백옥연의 문향, 가다가 멈추는곳〉화순 물염정(勿染亭)
세상에 물들지 않은 물염정(勿染亭), 물염에 물들다||화순적벽, 강산은 천년주인, 사람은 백년손님이라네
입력 : 2020. 09. 28(월) 10:36

1.물염정_속세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물염적벽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그 짱짱하던 매미들의 합창도 사라지고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몇 닢 안 남았다. 계절의 색(色)과 소리(聲)가 교대하는 시간이다. 가을은 추분에 둘로 나뉜다. 앞은 냇물처럼 선선한 가을이고, 뒤는 강물처럼 깊은 가을이다. 이 무렵이 '우렛소리가 멈추고 곤충이 땅속으로 든다'고 하는 때다. 깊어가는 가을, 세상에 물들지 않는 '물염(勿廉)의 땅'을 찾아 간다.

화순 동복(同福), 동남쪽으로 모후산이 진산으로 솟아있고, 북서쪽으로 백아산과 무등산의 연봉들이 멀리 병풍처럼 두른 곳이다. 산에서 발원한 물이 시리도록 맑은 동복천을 이룬다. 물은 산과 돌을 감고 돌아 이서면 창랑, 보산, 장항 일대 7km에 걸쳐 붉은 벼랑을 연출하니, 적벽(赤壁)이다. 노루목 적벽, 보산 적벽, 창랑 적벽, 물염 적벽. 적벽은 백악 후기 아득한 옛날 공룡이 살았던 시대, 퇴적층이 무늬를 형성하며 시루떡처럼 쌓인 것이다. 이곳은 시인 묵객들이 영감을 얻는 곳으로, 서민들의 가난한 나들이 터로 기능했다. 그러다가 1971년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됐고, 1985년 동복댐의 건설로 인근 15개 마을이 수몰되면서 접근불가의 지역이 되었다. 적벽은 30년만인 2014년 10월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최고 절경으로 이서면의 노루목 적벽을 꼽는다. 물염 적벽과 창랑 적벽은 언제나 갈 수 있지만 노루목 적벽과 보산 적벽은 화순군의 '적벽 투어'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적벽'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1519년 기묘사화 이후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소동파의 적벽에 버금간다하여 '적벽'이라 했다. 적벽은 최산두를 시작으로 동복현감이었던 석천 임억령, 신재의 제자였던 미암 유희춘, 하서 김인후, 무등산을 유람한 뒤 <유서석록>을 쓴 제봉 고경명, 그리고 학봉 김성일, 농암 김창협, 다산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명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천하 제일경으로 이름난 곳이다. 삿갓을 눌러쓰고 세상의 '염(染)'을 경계한 난고 김병연이 적벽에 시를 남기고 생을 마친 곳이 동복 땅이다.

"無等山高松下在(무등산고송하재)

赤壁江深沙上流(적벽강심소상류)"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가지 아래 있고

적벽 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에 물이더라

-김병연(김삿갓) 시조 중에서-

창랑 적벽을 지나 상류로 올라가면 '물염정(勿染亭)'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2호다. 호남 8대 정자 중 으뜸으로 꼽는다. 정면에 물염 적벽을 마주하고 있다. '물염정'의 주인은 물염 송정순(1521~1619)이다.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중립(中立), 호는 물염(勿染)으로 담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구(宋駒)이며, 어머니는 감춘추관사 안축(安軸)의 딸이다. 1558년(명종 13)에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감찰과 시강원보덕을 역임했다. 을사사화로 우계 성혼, 율곡 이이, 사암 박순, 송강 정철 등이 무고를 당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신원의 소를 올렸다. 구례와 풍기군수 등 7현의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고 청렴결백하여 이름이 높았다.

'물염(勿染)'이란 무엇일까? 여암 신경준은 <물염정기>에서 "물(勿)은 금지의 말이고, 염(染)은 세상에 물든 것을 말하니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출세보다도 앞선다"고 했다. 세상의 부조리한 것으로부터 물들지 않으려 했던 정자 주인의 삶의 태도를 담은 말이다. 송정순은 공주목사로 재직 중 병을 얻어 벼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이곳에 터를 잡고 별서로 강가에 정자를 지어 요양소로 삼았다. 불행히도 후사가 없어 물염소의 강정(江亭)과 주위의 전답 그리고 수직하는 종까지 외손인 나무송, 나무춘 형제에게 물려주었다. 선견지명이었을까, 후일 후손들 중 잡음이 나면 증명하라는 '증여기'를 남겼다.

창주 나무송(羅茂松 1577~1644)은 광해군 6년 문과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으며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다. 병자호란을 맞아 병조좌랑으로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할 때 호종하는 일을 맡았다. 구화 나무춘(羅茂春 1585~1619)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의 반대 상소를 올리다가 삭관 폐출되어 낙향한다. 정자를 외조부로부터 물려받은 이후 '창랑정'이라 편액하여 오랫동안 경영하다가 나무송이 새로 이축한 뒤 외조부의 호를 따라 비로소 '물염정(勿染亭)'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당초 송정순이 지은 정자는 지금과 달리 별서, 농막의 형태였던 것을 외손 나무송이 '창랑정'이라 했다가 중건하면서 '물염정'이라 개칭했다는 얘기다. 나영채 물염정보존회 상임고문(88)은 "50여년을 물염정 보존·관리와 연구에 전력을 다했다"며 "정자의 이름 '물염'의 뜻을 잘 계승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물염정 제영시들은 경관을 읊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정자 이름을 따라 염을 경계하며 마음을 곧추세우는 것들도 남아 전한다. 물염정이 있는 적벽 지역은 시문의 살롱공간이었을 뿐 아니라 의병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고 실학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청랑정의 정암수는 임진왜란 때 거의했고 정지준과 하윤구도 병자호란 때 이곳에서 깃발을 들었다.

적벽에 살았던 석당 나경적은 홍대용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그의 나이 70세에 서양식 시계인 후종(자명종)과 서양식 천측기인 기형혼천의를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직접 선기옥형(혼천의), 자명종, 자명침, 자전마, 자전수차 등을 제조했는데 그 명성이 중국에 까지 알려졌다. 전국에 알려진 시계기술자이며 그의 문인에 안처인이 있어, 구상은 나경적에게서 제작은 안처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실학 정신은 한 마을에 살던 규남 하백원에게 전수되어 1810년 '자승차'라는 자동양수기를 발명하기도 한다. 물염정 가까이 규남박물관에 그의 실학 사상의 결과물들이 각종 기기로 전시되어 있다.

물이 오염된 것은 맑은 물로 씻으면 된다. 정자가 노후된 것은 좋은 도구로 깎아내면 되지만 마음이 오염된 것은 물로도, 도구로도 어찌할 수 없다. 물염을 쫓아 물염정에 오르내린 날, 파란 하늘은 티끌하나 없는 물염의 쪽빛이고, 붉은 절벽을 따라 펼쳐진 동복호는 하늘의 쪽빛을 받은 물염의 윤슬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곧 추석이다. 성묘를 마쳤거든 코로나로 얼어붙은 도심을 떠나 한적한 곳에서 심신을 재충전하면 좋을 시간이다. 적벽 투어는 할 수 없지만, 창랑 적벽과 물염 적벽에 다녀올 수는 있다. 그리고 물염정에 올라 맑은 가을 하늘과 쪽빛 동복호에 취해보는 것도 권할만한 일이다. 다시 길을 나서 호남실학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규남 박물관을 거쳐 조광조의 적려지 그리고 물염정과 연관이 깊은 담양 금성면 금성리 나산마을에 들러보아도 좋다. 그곳에는 송정순의 딸이자 나덕용의 부인인 홍주송씨의 효열문이 있다.

1-1물염정 오르는 길_사진백옥연

1-2.물염정 뒷편에서_사진 백옥연

1-3.김삿갓 시비 쪽에서 바라본 물염정_사진백옥연

화순 4대적벽 중 창랑적벽_사진 백옥연

화순 4대적벽 중 창랑적벽2_사진 백옥연

물염 송정순의 딸이자 남강공의 처인 숙인홍주송씨에게 1610년 내려진 효열부 정려 효열문(孝烈門)-사진 백옥연

노루목적벽

노루목적벽2

물염적벽.사진 백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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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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