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산사 문 앞에서 또 봄을 보내나니(古寺門前又送春)
지는 꽃잎 비에 날려 옷에 점을 찍네(殘花隨雨點衣頻)
돌아가는 길 소매 가득 맑은 향 배어나와(歸來滿袖淸香在)
산벌들이 떼 지어 멀리까지 따라오네(無數山蜂遠趁人)'
또 한 번의 봄이 지고 있다. 석천은 옛 산사 앞에서 봄을 전송하고 있다. 비를 따라 날리는 봄의 마지막 꽃잎들. 석천의 소매 위에 떨어져 꽃잎은 점이 된다. 그 향기를 따라 산 아래 먼 곳까지 벌들이 무리지어 따라오고 있다. 꽃비 내리는 봄날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그림이 그려지는 듯하다. 서정성 짙은 당풍(唐風)의 시다. 석촌이 친구 자방(子芳)에게 보낸 시다.
송나라 유성(兪成)의 '형설총설(螢雪叢設)'의 이야기 한 대목. 어느 시화연에서 화제(畵題)가 주어졌다. '꽃 밟으며 돌아가니 말발굽에 향내가 나네(踏花歸去馬蹄香)' 꽃밭을 돌아다녀 말발굽에 묻은 향기를 그림으로 그리라는 것이다. 난감한 화제다.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다. 한 무명화가가 이 상황을 절묘하게 타개한다. 달리는 말의 꽁무니를 나비 떼가 뒤 쫒는 그림이었다. 말발굽의 향기라는 난제를 나비를 등장시킴으로써 가볍게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장원을 차지했다. 옷소매의 향기를 따라 산벌들이 쫓아오는 풍경과 말발굽의 향기를 쫓아 나비들이 날아오는 모습은 흡사하다. 두 시는 '시는 소리가 있는 그림(有聲之畵)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無聲之詩)'라고 할 때의 유성지화(有聲之畵)처럼 언어로 그린 그림을 보여준다. 시를 그림으로써 한 경지를 보여주었던 임억령, 그는 3천여 수의 방대한 시를 남겼다. 16세기 조선 시단을 이끌었던 석천 임억령을 찾아 담양의 성산사와 식영정에 간다. 긴 장마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여름의 끝자락이다.
16세기는 조선의 성리학이 독자적인 학문으로 발전한 전성기이면서 사화와 당쟁의 절정기이기도 했다. 뜻 있는 학자와 관료들은 백성들의 곤궁한 삶은 팽개친 채 파당을 지어 사리사욕에 혈안이 되어 있는 시대상황에 절망했다. 혹은 벼슬을 버리고 자진 낙향했고, 혹은 사화에 연루되어 강제 귀향했다. 그들은 광주와 담양 인근, 무등산 북쪽 자락에 누정을 짓고 학문에 힘쓰거나 음풍농월하면서 역사에서 비켜섰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남도 사림문화의 꽃을 활짝 피운 계기가 된다. 영남에서는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등을 필두로 성리학과 철학이 단단한 뿌리를 내리게 했으며, 호남에서는 무등산 원효계곡과 담양 창계천을 중심으로 시가문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게 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시인들이 호남에서 많이 나왔다고 하면서 박상, 임억령, 임형수, 김인후, 양응정, 박순, 최경창, 백광훈, 임제, 고경명을 꼽았다. 임억령은 '호남사종'이라 불리며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과 <식영정>을 중심으로 '성산시단'을 이끌었던 한 가운데 있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546~1568). 조선 중기 문신으로 해남군 동문 관동리에서 아버지 임우형, 어머니 음성박씨 사이에서 5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 자는 대수, 호는 석천으로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개울이름을 호로 삼았다. 7세에 숙부 임우리에게서 글을 익혔다. 14세에는 동생 백령과 함께 호남시학의 원조 눌재 박상과 그의 아우 육봉 박우(사암 박순의 아버지)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당시 눌재는 석천 형제의 지재를 알아보고 형에게는 <장자>를 가르치면서 '반드시 큰 문장이 될 것'이라 했고, 아우에게는 <논어>를 읽히면서 '족히 큰 벼슬을 하리라'고 했다. 석천은 눌재를 사사하면서 호남사림의 본류 속으로 들어갔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한 도학자 눌재의 학문적 소신은 석천의 강직하고 곧은 성품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 스승이 그의 외삼촌 박곤이다. 전주 통판을 지낸 그는 임진왜란의 선봉장이었던 회재 박광옥의 아버지다. 그는 석천에게도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학문과 인품 여러 면에서 석천을 이끌어주었다. 1518년 진사가 되고, 1525년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갔다. 부교리, 사헌부 지평, 홍문과 교리, 세자시강원 설서 등 두루 관직을 거쳐 1541년에는 사간원 대사헌에 오른다.
석천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었다. 천령, 만령, 억령, 백령, 구령이다. '구(九), 백(百), 천(千), 만(萬), 억(億)' 등 영(零)이 하나씩 붙는 십 배수를 이름자에 쓰는 것은 장수와 부귀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름의 소망과는 달리 두 형 천령과 만령은 조광조와 함께 개혁에 참여하면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숙청되는 비운을 맞는다. 넷째 괴마 임백령은 과거에 합격, 영광군수와 도승지를 역임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네 차례나 대사헌을 역임했다. 눌재의 예견대로 승승장구하였다. 호조판서가 되어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소윤파에 가담, 을사사화를 주도하여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석천은 큰 자괴감을 느껴 벼슬을 사직했다. 당시 금산군수였던 임억령은 동생을 찾아 의리와 명분을 좇을 것을 당부했으나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아우의 귀에 들릴 리 만무하다. 석천은 형제 의절한다. '잘 있거라 한강수야, 풍파 없이 그저 평온하게 흐르기를(好在漢江水 安流莫起波)…' 기원하는 시를 한수 남기고 고향 해남으로 낙향했다. 이듬해 동생 백령이 위사공신의 녹권과 공신교서를 보내오자 격분하여 서류를 태워버린다. 임백령은 위사공신 1등록에 책록 되었으나 명나라 사은사로 다녀오던 중 병사했다. 선조 즉위 후 을사간당으로 지목되어 훈작을 삭탈 당했다. 다섯째 임구령은 백령을 따라 을사사화에 가담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정3품 광주목사로 승진했으나 사헌부, 사간원의 탄핵과 전라도관찰사 박수량의 상소로 삭직되었다. 너무도 다른 형제의 길이다. 장자를 읽은 석천은 고고한 선비로 살았던 반면에 논어를 잘못 읽은 동생 백령은 시류에 영합한 출세지향적 인물이었다. 임억령은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동부승지, 병조참판,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77년 62세에 담양부사가 되었다. 석천은 담양군 남면 성산의 경치에 흠뻑 취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 하였다. 본격적인 성산 생활의 시작이다.
식영정은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누정이다. 1560년(명종 15)에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을 위해 정자를 짓고 이름과 기문을 부탁했다. 석천은 <장자> 제물편에 나오는 식영(息影), '그림자도 쉬어가는' 것으로 당호를 삼고 직접 '식영정기'를 지었다. 식영정은 성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가파른 벼랑 위에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사이로 난 언덕길을 올라가면 늙은 소나무와 배롱나무로 둘러싸인 식영정이 무등산을 바라보며 운치 있게 앉아 있다. 식영정 정남쪽으로 증암천의 충효교 건너편 동산에는 환벽당이 있고, 남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는 소쇄원이 있다. 면앙정 송순은 식영정의 시를 차운하여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고 하면서,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을 '한 동네(증암천) 안에 세 명승(一洞之三勝)'이라고 찬했다. 정자 아래로는 푸르른 광주호가 펼쳐져 있어 눈을 시원하게 한다. 동쪽 아래로 김성원의 서하당이 자리하고, 부용정이 두 다리를 담근 채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식영정 동북쪽으로 석천 임억령과 서하당을 배향한 성산사(星山祠)가 최근 복원되어 있다.
식영정은 성산가단의 모태로 이곳에서 석천을 중심으로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등이 시문을 주고받았는데 이들을 '식영정 사선'이라 불렀다. 네 사람이 각각 20수씩, 80수를 지은 '식영정이십영(詠)'은 이 일대의 풍광을 두루 묘사한 천의무봉의 절창으로 꼽힌다. 아름다운 경치와 뛰어난 문우를 찾아 이곳에는 수많은 묵객들이 드나들었다.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소쇄옹 양산보, 옥봉 백광훈, 구봉 송익필, 김덕령 등이 그들이다. 식영정, 서하당, 부용당, 환벽당, 취가정 등은 이들의 문학의 산실로서 누정문화의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다. 석천은 식영정에서 옥봉 백광훈, 백호 임제, 송천 양응현, 고죽 최경창 등 제자를 길러내 성산동 계산 풍류의 시종(詩宗)으로 추앙을 받았다. 김인후는 석천을 이백에 빗대 시선(詩仙)으로 칭송하였으며, 퇴계는 그를 유관좌상(儒冠坐上)이라 하였고, 율곡은 '선생의 탁월한 시문과 학덕에 감탄하여 무릎이 절로 꿇어진다'고 했다.
식영정의 주인 석천은 호남시학의 한 봉우리를 이루고 1568년 향년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에 그가 살았던 세월의 긴 그림자가 누워있다. 담양 성산사와 전남 해남의 해촌서원, 전남 화순의 도원서원에 배향되었다. <석천집>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담양 가사문학관에도 고봉 연간의 간행본 <석천집>과 <석천선생시집>, 목판 석천이 애용한 옥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산봉우리에 뭉게구름 몽실몽실(溶溶嶺上雲)
피어오르자 이내 걷히고 마네 (纔出而還斂)
구름이 사라지면 무엇이 구름일까(無事孰如雲)
서로 보아도 둘은 싫어하지 않네(相看兩不厭)
/서석한운(瑞石閑雲), 석천 임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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