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이미 14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던 역사와 두뇌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오. 영국의 조선(造船)역사는 17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소. 우리가 3백여 년이나 앞선 것이었소.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져 녹슬었던 것일 뿐, 잠재력은 14세기 그대로, 하나도 녹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라오."
우리나라 조선업계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1%에도 못 미치던 1970년 초. 아무도 꿈꾸지 않았을 때 현대그룹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한 꿈을 꾸었다. 나라 안팎의 우려와 반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에 조선소를 건설하기로 결심한다. 배를 건조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다.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역시 돈이다. 그는 외자확보에 나섰다. 현대는 당시 영국의 바클레이 은행과 4,300만 달러(약 510억 원)에 이르는 차관도입을 타진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노(NO), 예상대로 거절당했다. 조선 능력과 기술 부족이 거절 이유였다. 1971년 9월 정 회장은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문을 두드린다.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찾아간다. 이 회사는 바클레이 은행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이었다. 롱바텀 회장 역시 고개를 내젓는다. 그때 정 회장은 지갑에서 지폐를 한 장 꺼낸다. 한국 돈,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500원 지폐였다. 이것이 거북선이며, 우리는 이미 14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던 역사와 두뇌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는 그 절박한 호소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74년이었다. 그 뒤 210만 총t 규모의 선박을 수주, 일본의 미쓰비시 중공업을 제치고 조선부문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 선 것은 그로부터 불과 11년이 흐른 1983년의 일이었다.
이 삽화는 배 만드는 공장도 없이 뚝심으로 한국의 조선업을 일으킨 정 회장의 '500원 지폐의 거북선 신화'로 회자되는 이야기다. 그 500원 지폐에는 바다 위에 도열한 거북선과 판옥선이 등장한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건립 때 자금 조달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거북선은 지금으로부터 428년 전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도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는 신화였다. 거북선을 말할 때 늘 함께 불리는 인물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이다. 임란 때 이순신이 세계 해전사에 23전 23승이라는 불패의 신화를 기록하며 구국의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전략과 전술,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새로운 병기인 거북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인사전략가이기도 했다. 그의 인사전략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거북선을 설계하고 제작한 조선 과학자 체암 나대용(羅大用,1556~1612)에 관한 것이었다.
이순신과 거북선의 신화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망암 변이중이 제작한 '변이중 화차'로 행주대첩에서 승리를 이끈 권율이 조정에 낸 장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체암공이 없었던들 충무공이 그 같은 큰 공을 세울 수 없었으며 체암 공은 충무공이 없었던들 그 포부(거북선 제작)를 실현하지 못했을 것이다'는 기록이다. 임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는 체암의 공이 충무공 못지않게 컸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충무전서에는 '충무공이 거북선 뿐 아니라 다른 무기 제작도 체암과 함께 의논했다'고 적고 있다. 충무공 휘하에서 거북선을 건조하여 임란 당시 빛나는 조선 해전의 역사를 함께 이끈 나대용, 그를 만나러 나주 문평 소충사를 향해 간다.
나대용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백룡산의 지맥인 제봉산 기슭의 나주군 문평면 오륜동에서 1556년(명종 11년) 아버지 항(亢)과 어머니 광산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금성이며 자는 시망, 호는 체암(遞菴)이다. 봉황새가 크게 울면서 바위덩이만한 큰 알을 떨어뜨리니 어머니가 이를 받아먹었다는 태몽이 전한다. 어려서 학문이 뛰어나고 무예를 즐겼다.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8년 동안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다가 1583년 낙향했다. 그는 이 무렵 본격적인 거북선 연구와 제작에 착수한다. 10여 년 거북선에 대한 기본 설계를 비롯한 제작과정을 연구한 뒤 최초로 거북선을 만들어 마을 앞 저수지(방죽골)에서 첫 실험을 끝냈다고 한다. 마을 노인들에 의하면 나대용의 거북선의 착상은 날아다니는 풍덩이와 방죽에서 빙글빙글 도는 물방개의 형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실제 오륜 마을에는 나대용이 물방개 같은 거북선을 만들어 왜적을 물리칠 것이라는 동요 '물방개'가 오늘날까지 구전되고 있다.
물방개 노래
빙글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
비바람 거친 파도 걱정일랑 하지마라
크게 쓰일 장수 나와 낙락장송 다듬어서
너 닮은 거북배 바다 오적 쓸어낸다.
어허 둥둥 좋을시고 빙글빙글 돌아라
잘도 돈다 물방개야 잘도 돈다 물방개야
나대용이 거북선의 제작을 연구했다는 물방개 노래는 '나대용이 거처하는 방의 벽에는 거북선의 설계도로 덮였고 낮에는 산에서 벌목하여 배를 만들었다'는 <호남동순록>의 기록이 뒷받침 한다. 선조실록의 나대용 상소문에는 '1591년 수사 이순신의 막하에서 전선을 감조하고 군병을 출납하는 군관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있다가 류성용의 천거에 의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다. 그 때가 1591년으로 임진왜란 1년 전이다. 그 소식을 듣고 훈련원 봉사시절 함께 근무했던 대용은 거북선 설계도를 가지고 여수에 있는 이순신을 찾아간다. 이순신도 적이 침입을 예측하고 병기, 군사, 방어 등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용장이 용장을 알아보는 법.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대용은 이순신 휘하에서 감조군관으로 본격적인 거북선 제작에 들어갔다. 실로 거북선은 충무공의 위대한 식견과 체암공의 특출한 기술의 조화로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임란 하루 전 4월12일 거북선의 화포실험을 마쳤고 모두 세 척의 거북선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하루 뒤 인 13일 왜군이 부산을 통해 침략해 왔다는 급보가 날아온다.
체암은 조선기술 뿐 아니라 전략전술에도 능해 제1차 옥포해전에서는 유군장으로 출전하여 왜적의 대선 두 척을 대파한다. 2차 사천해전에서는 손수 만든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두었으나 충무공과 함께 적탄에 중상을 입었다. 당포전투에서도 왜선 수십 척을 불태웠으나 재차 철환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당항포, 한산도 대첩에 참여하고 적장 조승감의 부하 망고질지를 사로잡아 작전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공을 인정받아 강진현감으로 제수되었고 그 뒤에도 금구, 능성, 고성 등 일곱 고을 현령으로 보직되어 전란수습과 민생안정을 위해 헌신한 목민관이기도 했다. 충무공이 모함으로 투옥되자 동지들과 옥문 밖에서 무고함을 주장했다.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이 다시 돌아오자 명량대첩에 나가 유례없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11월 8일 노량해전에서 충무공과 사촌동생 치용이 순국하면서 대첩을 거두었다. 선조로부터 포상교지 및 청룡도와 삼지창을 하사받았다.
임란 이후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거북선의 불편함을 개선한 창선 25척을 창안, 제조하고 남해현령으로 있을 당시 쾌속선인 해추선을 발명, 제조하였다. 1611년 우리 역사상 가장 탁월하고 재능 있는 조선기술자로 인정받고 경기수군을 담당하는 교동수사에 제수되었으나 두 번에 걸친 탄환 상처가 재발하여 57세를 일기로 숨졌다. 체암 나대용은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고, 전후에 창선・해추선을 제작한 조선의 과학자로,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전승을 거둔 용장으로 이순신과 함께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의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는 충무공과 체암공의 만남과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충무공과 체암공의 아름다운 만남이 구국의 길로 이어진 것이다.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소충사(昭忠祠)에는 나대용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 앞에는 나대용의 동상과 그의 업적에 비해 작게 조형된 거북선이 나란히 서 있고 거북선을 만들어 시험했다는 방죽골도 있다. 방죽골을 복원하여 풍뎅이와 물방개가 함께 노닐고, 그곳에 나대용 거북선 한 척 띄우면 어떨까. 사우 가까이 있는 생가와 묘소 등 호국유적지가 전라남도 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나대용의 공적을 선양하기 위한 (사)체암 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전라남도. 나주시와 함께 현창하고 있다. 해군은 나대용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9년 11월30일 우리 기술로 진수된 1천200t급 잠수함에 '나대용 함'이라고 명명했다. 나대용함은 우리 해군의 장보고급 잠수함으로 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으며 어뢰와 기뢰도 탑재할 수 있다. 나대용 함 해군 승조원들도 매년 4월21일 과학의 날, 소충사에서 열리는 추모제에 참석하여 나대용 장군의 국토방위 업적과 뜻을 기리고 있다.
(사)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 나오연 이사장은 "기념사업회에서는 오랜 시간 전라남도·나주시와 함께 소충사의 복원·정비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나대용 장군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재조명해 왔습니다."라면서 "나대용 장군은 무관임에도 거북선을 설계, 건조한 과학자입니다. 위기의 국난을 극복하는데 앞장서신 분으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과학정신과 우국충정의 정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곳 소충사 일원이 그분이 남기신 시대정신을 발전시켜 특히 청소년들이 용기와 지혜를 모아 위기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역사공간으로 조성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기념사업회의 꾸준한 현창 노력에 힙입어 사학계는 물론 많은 일반인들이 나대용은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주 문평 오룡리는 거북선의 고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대용 장군이 설계한 거북선은 2016년 미국해군연구소에서 세계 7대 전함을 선정할 때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나머지 6개전함이 모두 1900년도 이후인 반면 거북선은 유일하게 1500년대에 제작된 전함으로 선정되었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이는 고 정주영 회장이 조선업 시작의 난관을 거북선을 상기시키면서 돌파했던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하기도 했고, 훗날 우리나라가 조선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역사적 근간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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