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라의 현대미술 산책 7>
(7) 타자들의 미학||“주변에서 중심으로…견고한 서구 백인 중심 체제 균열” ||흑인작가들 국제 미술계 부상…베니스비엔날레 등 잇단 수상||역사와 경험 반영한 내러티브 차별화…평등과 인권의 메시지
입력 : 2020. 07. 05(일) 14:17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전 황금사자상 수상작 아드리안 파이퍼의 작품. Adrian Piper Research Archive Foundation Berlin 홈페이지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최근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숨진 후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문화예술계도 #BLM 운동에 대한 지지와 공권력 남용에 희생된 고인을 추모하는 캠페인에 동참하고 나섰다.

인종차별 반대 시위의 역사는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발화된 블랙파워(black power) 운동은 페미니즘과 동성애 권리 등 일련의 해방운동과 맞물려 기존 제도권에 균열을 일으켰다. 당시 미술계에서도 순수성과 배타성, 엘리트주의로 대변되는 백인 남성 중심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변방의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동안 현실과 괴리되었던 미술이 사회·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말'을 걸게 된 것이다.

서구 백인 중심 지향적인 체제의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주체 또한 울타리 외곽에 있는 유색인과 여성들 일 것이다, 후기식민주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이 스스로의 언어를 획득했을 때 하위주체로서 발언이 가능하다 했듯, 미국 내 아프리칸 아메리칸 작가들의 발언은 시작되었다. 그들만의 역사와 배경이 녹아든 '언어'로 말이다.

유색인과 여성이라는 이중 차별을 겪었던 아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는 인종주의에서 확장하여 인간 존엄성의 본질을 그녀만의 시각언어로 구체화했다. 2015년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전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사진 연작은 앵글 속 얼굴이 샌드페이퍼로 지워지고 그 위에 "Everything will be taken away"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적 식별 가능성을 없애버리면서 인간 본연의 존재에 몰입하게 한다. 2016년 제9회 베를린비엔날레에서는 미국 남부지역 인사말인 'Howdy'를 선보이면서 결코 안녕치 못했던 인종 차별의 역사를 강렬하면서도 나직하게 은유한다.

검은 종이 실루엣 작업으로 알려진 카라 워커(Kara Walker)는 흑인 여성들의 성적 탄압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집요하게 천착한다. 인종, 섹슈얼리티, 젠더, 폭력 등 현대 사회의 모순이 인형극을 연상케 하는 단조로운 실루엣으로 표현되면서 반전과 공모를 꾀한다.

직설적인 화법이 아닌 암시와 반격의 어휘가 더욱 강렬한 메시지를 창출한다는 것을 두 여성작가는 보여준다.

흑인 지위 향상 운동에 관한 작업을 해 온 데이비드 해먼스(David Hammons)는 흑인 게토의 일상을 미술로 편입시켰다. 1970년대 중반 뉴욕 할렘으로 이사한 후 접한 빈민가는 흑인 의식의 생생한 원천이었다. 싸구려 병뚜껑, 닭 뼈, 배설물 등 비루한 삶의 흔적들은 설치 작품으로 재탄생됐다. 단정하고 위생적인 백인의 문화적 가치를 비튼 전복적 유희이자 주류 사회의 허식에 대한 전회술이었다. 'spade' 시리즈물은 일상적 육체노동의 도구인 삽을 오브제로 활용하면서 노예의 예속과 힘, 속박과 저항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타자를 중심화하려는 예술가들의 함성이 축적되어 최근 몇 년 새 미국 내 흑인작가들의 부상이 두드러지는 추세이다. 그들만의 차별화된 서사와 전략으로 국제 미술계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한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는 유년시절 '마이너'로서의 경험과 영감이 반영된 추상작업을 선보였으며, 2019년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아서 자파(Arthur Jafa)는 대형 타이어를 쇠사슬로 감은 설치작품 'Big Wheel'을 통해 쇠락해져가는 미국 자동차 산업과 고통 받는 흑인 노동자 사회의 단면을 그려냈다.

케리 제임스 마샬(Kerry James Marshal)은 흑인의 역사와 문화, 일상을 담은 역동적이면서 독창적인 회화로 세계 미술 무대에서 입지를 굳혔다. 2018년 그의 대표작 'Past Times'이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2천150만 달러(약 230억 원)에 낙찰됐으며, 같은 해 아트리뷰가 선정한 '미술계 파워 100인' 중 2위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2008년 제7회 광주비엔날레 참여 당시 '내 심장의 모든 박동' 설치작품에서 미국 흑인 동네의 전형적인 모습과 흑인 연설에서 따온 문구로 이루어진 표지판 등을 생생하게 재현한 바 있다.

이처럼 아프리칸 아메리칸 작가들은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고뇌 속에서 그들만의 문법을 시각화하고 인권주의적 담론을 발신하면서 수 백 년 간 지속되었던 서구 백인 중심 미술사와 사회 구조를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던 후기식민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그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 유색인으로서 바라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 한 인종에 의한 다른 인종의 노예화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 (…) 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지금 바로, 인류 공동체의 평등과 인권에 대한 날선 물음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이다.

제9회 베를린비엔날레에 설치된 아드리안 파이퍼의 'Howdy', 필자 제공

케리 제임스 마샬 '내 심장의 모든 박동' 설치 장면, Kerry James Marshall Courtesy the artist and Wexner Center for the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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