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로가 묻는다. 인격이 완성된 사람(成人)은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 답한다. 이(利)를 보면 의를 생각하고(見利思義),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치는(見危授命) 사람이다. 또 오랫동안 곤궁해도 평소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성숙한 인간이라 할 것이다. 견리사의란 눈앞의 이익이 과연 의에 합당한지 따져보고, 무슨 일이든 의를 판단의 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견위수명 역시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목숨을 내놓을 용기와 의로움을 강조한 말이다. 공자의 의를 뒤로 잇는 것이 맹자의 생사취의(捨生取義)이다. 두 사람의 의는 죽음에 앞선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생을 버리고 취해야 할 절대적 가치로서의 의가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생사취의를 실천한 위인 가운데 송천 양응정이 있다. 그는 을묘왜변,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의병 창의를 독려하는 조선 최초의 의병 선각자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와 있던 조광조가 흙으로 돌아가던 그해 능주 도곡면에서, 그러니까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양응정은 태어났다. 학포 양팽손의 셋째 아들이다. 양팽손이 누구인가? 조광조와 생원시에 함께 합격한 동기이자, 사회 개혁의 동지이며, 조광조와 기묘명현을 위해 글을 쓰고, 그의 시신을 거두어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던 사람. 양응정이 다섯 살이 되던 해 양팽손은 화순 쌍봉사 근처에 학포당을 짓고 은거한다. 학포는 그해 집 벽에 "문왕의 아들로 무왕이 태어났고, 학포의 아들로 송천이 태어났다"고 썼다. 양응정은 학포당에서 아버지와 함께 기묘사화를 겪어 온 최산두, 신잠, 윤구, 백인걸 등의 명현들로부터 배웠다.
송천 양응정(1519~1581)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1519년, 지금의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에서 학포 양팽손의 3남으로 태어났다. 1540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155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계로 나아갔다. 1555년(명종10) 5월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구가 7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달량진(해남 북평면 남창)을 침공하여 영암, 장흥, 강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37년 전의 을묘왜변은 '다가올 전쟁의 신호'였다. 이 전쟁에 대한 지식인의 인식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유비무환과 무사안일의 이 간격이 훗날 조선 역사의 운명을 가른다. 송천은 을묘왜변을 거치면서 안일한 자주국방의 폐해를 지적하고 장차 있을 또 다른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한다. 양응정은 모친상 시묘살이 중이던 양달수에게 충효일치(忠孝一致)를 강조하면서 전쟁에 출정할 것을 요청했다. 또 그의 영향을 받아 달량진 전투에 제자 고죽 최경창은 17세로, 옥봉 백광훈은 19세로 참전하였다. 백광훈은 이 전투에서 종군시 <달량행>을 지었다. 달량성 전장의 서사 칠언시는 <옥봉시집>하권에 실려 있다.
임진왜란 30여년 전에 발발한 을묘왜변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참혹했던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전조였고, 송천은 그 난국을 멀리서 예견했던 선각자였다. 1556년 조정에서 을묘왜변에 대한 교훈을 삼고자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오랑캐를 물리칠 대책을 물었다. 송천은 <남북제승대책>이라는 국가 방위에 대한 뛰어난 책문으로 문과 중시에서 장원을 한다. 그는 이조좌랑에 오르고 삼사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두루 거친다. 그는 관직생활을 하면서 굽히지도 타협하지도 않아 척신 이량과의 갈등을 빚은 뒤에 외직으로 나가 관서 및 관북 평사를 역임했다. 오히려 그런 외직이 국방전략가로서 새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을묘왜변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송천이 낸 해법 <남북제승대책>은 훗날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송천은 '자주국방을 위한 대책'과 함께 '양민'을 위한 방안도 제시한다. 율곡 이이의 양민을 통한 양병의 주장도 상당 부분 송천의 뜻과 맞닿아 있다. 아마도 송천의 남북제승대책에 따라 장차 일어날 변고에 미리 대비했다면 임진년에 있었던 그 참혹했던 전쟁에서 무방비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558년 양응정은 내직으로 들어간다. 이때 별시 고시관이 되는데 송천은 <천도책>을 시험문제로 낸다. 천문이나 바람의 순행과 기상의 이변에 대한 이치를 찾는, 말 그대로 하늘의 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기합일과 천인상감의 관점에서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사람의 기가 바르면 천지의 기도 역시 바르다는 것이다. 또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여야 천지가 평안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천지가 안정되려면 덕 있는 군주가 정치를 잘 하여야 한다고 끝맺는다. 천도책은 명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중국의 사신이 이를 보고, "천하문장의 책제, 일대현사의 답안"이라고 칭송하였다. 천하문장이 낸 시험문제이고 일대의 뛰어난 선비가 쓴 답안이라는 것이다.
1571년 양응정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는다. 경주부윤으로 근무하다가 파직된다. 양응정은 낙향하여 본가 능주에서 처가인 나주 박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조양대와 임류정을 짓고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이때 양응정은 고봉 기대승과도 자주 어울렸다. 송천은 문장에 능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선조시절에 팔문장가로 알려졌다. 1577년 양응정은 성절사로 명나라에 간 이후 다시 대사성 벼슬을 한 것을 끝으로 은퇴한다. 이후 인재 양성에 전념한다. 그의 제자로 송강 정철, 백광언, 백광성, 옥봉 백광훈, 고죽 최경창, 죽천 박광전, 최경회 등이 있다. 그는 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병법도 가르쳤다. 당시 '한강 이남의 사종'이라 일컬었던 시인 석천 임억령과 시로써 자웅을 겨룰 정도로 시를 잘 썼다. 또 하서 김인후의 <칠석부>를 잘 외웠던 여종 소합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를 읊을 정도로 다정다감하고 인간미 넘치는 시인이기도 했다. 송천은 1581년(선조14), 6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아들 산해, 산룡, 산숙, 산축, 산지가 대를 이었다. 정유재란으로 그의 많은 작품들이 유실되었으나 1842년 양상해에 의해 간행된 <송천집>에 그의 시 228수가 전해져 온다.
송천은 공업과 상업, 백성을 중히 여기는 실천궁행의 정치가였다. <남북제승대책>으로 중시 장원을 할 만큼 문장에 뛰어났으며, 자주국방의 양민-양병설을 주장한 병학의 이론가이기도 하다. 을묘왜변 때 의병을 일으키게 한 전략가가 양응정이었고, 임진왜란을 대비케 한 선각자가 양응정이었다. 그리고 양응정의 아들은 할아버지 양팽손, 아버지 양응정의 절의를 이어받아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의병으로 활약을 하였으며, 충효열의 기본으로 삼강정려가 내린 후손들의 마을에서 한말의병 창의가 일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여전히 황룡강이 흐르듯, 제주양씨의 의로운 기운들이 여전히 박산 마을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사후 그를 배향한 서원이 없다는 점은 아쉽다. 물론 아버지 양팽손으로부터 흐르는 절의정신이 양응정의 관직생활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래서 그의 역량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외직으로 닿는 경우가 많았다. 효성이 뛰어났던 첫째아들 양산해를 비롯 네 아들을 두었으나 임진왜란, 정유재란 간에 양산룡, 양산숙, 양산축 등 아들과 딸, 사위 등 일가족이 순절하였으니 시대적 상황에 의해 그를 추모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순조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씨 일가가 보여준 의는 인간의 바른 도리이다. 의에는 마땅함과 올바름이라는 두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마땅함이란 상황적 가치판단으로 어떤 조건에 어울리게 알맞은 것을 의미하고 올바름이란 도덕적 가치판단으로 말이나 행동이 이치나 규범에 벗어남이 없고 옳고 바른 것을 의미한다. 그의 아들들에게 병법을 가르치고 전략을 가르치는 일에는 나라를 향한 충의 마땅함이 있고, 그 맥을 이은 후손들의 의병 창의는 환란의 백성의 목숨을 구하는 실천궁행으로 이어지는 올바름이 있었다. 양응정의 의로움은 아버지 학포로부터 내려와 양씨삼강문에 정려된 아들 양산룡, 양산숙, 양산축, 그리고 제자 정철, 백광훈, 최경창, 최경회, 박광전, 안중묵, 그리고 신립, 정운, 김천일, 고경명, 송제민 등 송천사단으로 이어진다. 이른 아침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 나오는 길, 황룡강의 물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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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의 푸른 별이 된 충·효·열·의 양씨삼강문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유원지에서 황룡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등산 아흔아홉 골이 감싸 안은 박산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 제주양씨의 정려 광주시기념물 제11호 <양씨삼강문>과 임류정이 있고 <박산의병마을>이라는 표지석이 황룡강에서 올라온 안개에 둘러 쌓여 있다. 삼강문이란 충신과 효자와 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문(旌門)인데 <양씨삼강문>은 전국 유일의 국가에서 사액된 정려로, 송천 양응정 후손들의 대를 이은 의로운 DNA가 모여있는 삼세구정려이다. 송천 양응정의 부인으로 삼양포에서 왜군과 만나 아들, 딸과 함께 순절한 죽산박씨, 송천의 둘째 아들로 군량미를 모아 의병을 돕고 정유재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하다가 삼양포에서 왜적을 만나 어머니 죽산박씨와 함께 바다에 투신하여 순절한 효자 생원공 양산룡, 임진왜란 때 김천일 장군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강화도에 진을 친 다음 고경명 장군의 밀서를 가지고 의주행재소까지 가서 선조를 만나 의병의 활동과 적의 동태를 보고하고,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충민공 양산숙, 양산숙의 부인 광산이씨로 정유재란 때 무안 승달산에서 왜적을 만나 항거하다 자결, 송천의 넷째 아들인 효자 처사공 양산축, 송천 선생의 딸이며 김광운의 아내인 제주양씨, 외손자 김두남, 그리고 양산룡의 아내 고흥류씨, 김두남의 아내 제주양씨도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1635년 인조 13년에 9명을 포상하라는 왕명이 내려졌으나 생원공 양산룡의 부인 고흥유씨와 김두남의 처 제주양씨가 제외된 채 시간이 흐르면서 삼세칠정려로 굳어지고 말았다. 지난 2019년 제주양씨 한림종회에서 양승구 전회장이 주축이 되어 다행스럽게 2명의 행적과 승정원 일기를 발굴해 냄으로써 2명을 추가 배향하고 일문삼강 삼세구정려의 현판을 새롭게 봉안했다. 양씨삼강문은 왜란이라는 전쟁으로 박산마을의 송천 일가가 풍비박산이 나는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다행히 의모당 고씨(양산축의 부인으로 고경명의 손녀이며 고종후의 딸)만이 바닷속에 뛰어들자 여종들이 살려내 뱃속에 품은 아이가 나중 한림학사 양만용으로 제주양씨의 대를 잇는다. 이들은 학포 양팽손의 후손이다. 이곳은 의병장 공조좌랑 양산숙을 중심으로 할아버지는 기묘명현 증조부인 양팽손을 이어 대사성 양응정, 양산용 선생, 거오재 양만용 선생등 4대를 이어 충효열의(忠孝烈義)를 실천했다고 높이 추앙받고 있다. 박산 마을은 임진왜란부터 구한말까지 의병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忠(충)'의 고장으로 전국에서 명소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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