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김포세관… 안타깝게 유출된 분청사기 상감 묘지, 김해 공항서 단속 걸리자 서울로 빠져나가'(1998년 9월2일 조선일보)
'보물급 이선제 묘지 기증식 중앙박물관에서 열려' (2017년 9월19일 KBS)
앞의 것은 1998년 문화재적 가치가 큰 묘지(망자의 행적을 적어 무덤에 묻은 돌이나 도판)가 일본으로 밀반출 되었다는 기사이고, 뒤의 것은 그로부터 19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기증식이 열렸다는 기사이다. 높이 28㎝, 장폭 25.4㎝ 크기로, 1454년(단종 2)에 상감기법으로 만들어진 필문 이선제(李先齊,1390~1453)의 분청사기 묘지석이다. 앞면과 뒷면, 측면에 이선제의 삶과 가족에 대한 내용의 명문(銘文) 248자가 새겨져 있다. 광주 남구 만산동 묘소에서 도굴된 묘지를 고미술협회 김태형씨 등은 1998년 5월 김해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다 실패했다. 그러나 김씨 등은 한 달 뒤 여행용 가방에 묘지를 넣어 김포공항에서 검색조차 받지 않고 일본으로 밀반출했다. 당시 묘지의 가치를 알아본 김해공항 양맹준 문화재감정관이 반출을 불허하면서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하기 위해 조서를 작성하고, 최춘욱 감정관이 실측도를 그려두었다. 실측도 두 장의 스케치는 뒷날 이선제 묘지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이후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노력으로 일본 측 소장자였던 도도로키 구니에 여사가 기증을 허락하면서 2017년 8월 국내에 환수된 후 '보물 제1993호'로 지정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인계되고,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이 유물은 재단이 지난 몇 년간 국내환수에 공을 들인 도자문화재로 일련의 과정들이 매우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광산이씨 문중은 그간의 통례와는 달리 묘지의 국가기증에 동의하고 협상 전권을 재단에 위임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였다. 또 불법반출 문화재의 유통을 불명예로 여기는 일본인 고미술상 와타나베 쇼고씨의 직업윤리와 소장자 고(故) 도도로키 다카시씨 가족들의 광산이씨 문중 후손의 안타까운 심정에 대한 예의와 공감, 그리고 두 나라를 오가며 중재에 최선을 다했던 재단의 노력이 공동으로 빚은 성과라 할 수 있다.
광주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들에는 4월의 유채꽃이 노란 물결을 이루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변색하는 것이지만, 봄꽃들은 색이 분명하여 좋다. 진달래가 그렇고, 목련, 유채, 산수유, 모란, 그리고 동백이 그렇다. 마을 입구에 600년의 늙은 왕버들도 연두 빛 새순을 밀어올리고 있다. 내 눈에는 저 연한 초록도 꽃으로 보인다. 이 왕버들은 북을 걸어놓은 나무라 하여 '괘고정수(掛鼓亭樹)'라 불린다. 정(亭)은 멈추어 쉬는 정자를 이르는데 나무를 정이라 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넓게 퍼진 가지들이 처마를 이룬 정자인 듯하여, 과연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한다. 이선제가 심은 것으로 자손의 흥망성쇠를 함께 하리라 예언했다고 한다. 정약용의 '동남소사(東南小事)'에 따르면 세간에서 광산이씨 가문을 일컬어 고려 후기 이순백부터 10대에 걸쳐 홍패(紅牌·문과 급제 증서)를 받은 '십대홍문(十代洪文)'으로 홍패를 연결하면 병풍이 될 것'이라고까지 했다. 괘고정에서 가문의 광영을 알리는 북소리가 대대로 울렸으니, 상시로 북을 걸어두어야 하는 나무정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왕버들이 시들시들하였는데 1624년(인조 2) 이발과 이길 형제가 역적의 죄명을 벗고 복권되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1998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다.
광산이씨도문중 이남원 총무는 "2005년 괘고정에서 남구의 고시 합격자를 위한 괘고 축제를 열었다"면서 "괘고정 주변을 광주시의 명예의 숲이 되도록 조성하고 필문의 전통을 살려 문화축제로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가까이에 이선제의 신도비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이선제의 부조묘가 나온다. 부조묘 뒷산 언덕에 필문의 묘와 묘비가 있다. 부조묘는 나라에 특별한 공훈을 세운 사람을 기려 불천위(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신위)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지금으로 하면 국가유공자에게 내리는 보훈의 특전이어서 가문의 영광이다.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무덤 앞에 묻는다. 하지만 국가유공자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불천위는 사당에 계속 남아 후손의 기제사를 받는다. 이선제는 삶의 궤적이 불천위급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채 200년이 지나지 않아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 그의 5대손인 이발과 이길 형제가 정여립 모반사건이라 불리는 기축옥사에 연루되면서 필문의 가문은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된다. 대부분 문헌들이 어떠한 연유인지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고, 필문은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필문은 엄혹한 계유정난이 나던 해인 1453년 11월15일 한양에서 세상을 뜬다. 이듬해 봄 광주 원산동으로 이장되며 묘지석 또한 5월에 만들어져 나중에 매립했다. 세종~단종 간 핵심관료로 활약했는데도 조선왕조실록에 졸기 한 줄이 없다. 묘지에 또한 오자도 발견이 되기도 한다. 그의 죽음과 사후의 일들에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으나 기록이 없으니 추측만 분분하다.
최근까지 필문의 생년은 있으되 몰년(沒年)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에 생몰연대가 새겨져 있어 그의 생애는 1390년~1453년으로 첫 확인되었다. 처가 보성 선씨이고 가족관계에 대한 내용도 새롭게 파악되어 그간의 기록을 정정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의미가 컸다. 이는 또 15세기 중반의 위패형 묘지와 분청사기 연구에 중요한 실증적 자료가 되고 있다.
이선제, 조선 초기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이고 호는 필문이다. 포은 정몽주를 섬긴 매헌 권우(1363~1419)에게 배웠다. 1411년(태종1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19년(세종1) 문과에 급제했다. 1453년(단종1)까지 30년 이상을 관직에 있었다. 세종 2년에 학술과 정책을 자문하는 씽크 탱크였던 집현전이 설치되자 수찬, 교리, 직제학으로 집현전에 20년 가까이 일했다.
<태조실록>이나 <고려사> 개찬에 참여하면서 역사학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으며, 강원도 관찰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세자부빈객 등을 역임했다. 이선제는 주어진 관직에만 머물지 않고, 옛 제도를 고찰하고 잘못된 점을 개선했다. 소금을 국가수입원으로 삼아 국가재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이재소>, 국가 방어책을 위한 <군재소> 등 경제, 국방, 의료, 군신전 등 국정의 대소사에 자신의 견해를 올려 임금의 정책수립을 보좌했다. 1430년(세종 12) 광주목은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세종 12년 고을 사람 노흥준이 본주 목사 신보안을 때렸으므로 흥준을 장형에 처하여 변방으로 쫓아 보내고 강등하여 무진군으로 만들었다가 문종 원년에 옛날대로 복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광주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조선왕조 들어서 광주가 겪은 첫 번째 강등이며 세종의 수령권 강화정책을 최초로 어긴 것이다. 목의 복구는 20여년이 지나도 제자리였는데 광주 경재소 요원인 이선제가 유향품관, 인리를 이끌며 복권상소를 올려 1451년 광주목으로 회복된 것이다. 이를 자축하기 위해 공북루는 '모두 기뻐하며 서로 축하한다'는 뜻을 담은 희경루로 개명된다. 복권 이후 필문은 광주에 더 이상 불상사가 없어야 한다는 공론을 세우고 '광주유적'과 '광주향약'을 창안하였다. 광주 선비들은 이선제가 만든 유적과 향약을 토대로 결속하고 공부하여 16세기에 호남을 대표하는 사림으로 성장하였다. 지배층이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향촌 질서를 세우고 향약보급에 전념한 공로를 기려 1988년 필문로가 제정되었다. 남광주 사거리에서 조선대 정문을 지나 서방사거리까지를 '필문대로'라고 한다. 필문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 사우는 강진의 수암서원, 광주 남구의 부조묘, 화순 오현당, 화순 죽산사가 있다.
필문의 삶은 대를 잇는 관료 가문으로 학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고, 관료로서 경세에 밝고, 백성에게 모순이 되는 제도를 혁파해 나가려는 노력들은 훗날 다산에서 꽃피는 실학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의 사후,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후손의 노모와 어린 자식까지 도륙당하는 멸문지화를 당하는 점, 그의 묘지석이 밀반출 되었다가 환수되는 우여곡절을 거치고 있는 점 등은 너무나 드라마틱하다. 조선대학 앞을 지나, 연두가 초록이 되어가는 4월의 필문로를 걸으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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