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옥산서실(玉山書室)_옥봉 백광훈
들의 나물 하나에도 그리움이 깃든 ||조선 최고의 유랑시인이자 문장가
입력 : 2020. 03. 26(목) 14:18

옥봉 백광훈이 배향된 옥봉사_사진 백옥연

용강사(龍江詞)

妾家住在龍江頭 저는 용강 어귀 살아요

日日門前江水流 날마다 문 앞에는 강물이 흘러요

江水東流不曾歇 강물이 흘러흘러 쉼이 없듯

妾心憶君何日休 님 그리는 제 마음도 쉼이 없어요

江邊九月霜露寒 9월이라 강변엔 무서리 찬데

岸葦花白楓葉丹 갈대꽃 희게 피고 단풍잎 붉네

行行新雁自北來 줄지어 기러기는 북에서 와도

君在京河書未廻 서울 계신 님은 편지가 없네 (후략)

- 옥봉 백광훈

용강(龍江) 어귀에 사는 여인, 집 앞에는 강물이 흐른다.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님을 향한 그리움이 한시도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소식이 없다. 가을이 다 끝나가고 무서리가 내리는데 행여 님도 누각에 올라 달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할까. 님이 바라보고 있을 저 달을 마주하러 산에 오른다. 벼슬하지 않아도 좋으니 어서 돌아왔으면…. 아침 내내 까치 울음소리 들리는데 아마도 님이 돌아온다는 기쁜 소식이 아닐까. 마음 졸이며 끙끙 앓는데 또 하루가 그렇게 저문다. 그리움은 그린다 해서 그리움이다. 그리는 행위는 애타는 마음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몸짓이다. 시를 그리는 것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노래를 그리는 것이 그리움이다. 이 시는 님을 그리는 애절한 그리움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져 있다.

이 시는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이 뒷바라지 하느라 평생 고생만 한 고향의 아내에게 부치는 사부가(思婦歌)이다. 그의 '별가(別家)'에도 아내에 대한 애틋한 정이 담겨있다. 벼슬살이 때문에 멀리 떠나 있으면서 빈궁한 살림을 꾸려가느라 고생하는 병약한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사랑이 담겨있다. 옥봉은 조선 중기 최고의 시인이며 문장가로 꼽힌다.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에서 백세인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창경이고 호는 옥봉이며 본관은 수원이다. 옥봉 일가는 연산군 때 귀양 내려와 조부 백회 때부터 장흥에 터를 잡고 살았다. 맏형 기봉 백광홍은 평안평사로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가사 <관서별곡>의 저자이다. 둘째는 풍잠 백광안, 사촌동생 광성과 더불어 4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일문사문장'이라 불렸다. 또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의 진중에서 활약한 차남 송호 진남(1564~1618), 병자호란 때 의병이 되어 싸운 손자 상빈에 이르기까지 삼대 시인 가문으로 이름이 높아 '삼세삼절(三世三絶)이라 일컫는다. 장흥 기산에는 '팔문장시가비'가 있는데 옥봉을 비롯해 백광홍, 김윤, 임분, 임회. 백광성, 백광안, 김공회와 함께 '기산팔문장'으로도 불린다. 또 옥봉은 이이, 최경창, 송익필, 최립, 이달, 하응림, 이산해 등과 '조선팔문장'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조선 중기 고죽 최경창, 손곡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되었으며, 초서와 예서에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다.

옥봉은 다섯 살 때 글공부를 하러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옥산초당의 정응서 문하에 입문했다. 글씨와 시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는 스승의 권유로 13세에 한양으로 유학을 간다. 이후백, 박순, 양응정, 노수신 등 당대의 문장가들에게 폭넓고 새로운 학문을 익혔으며, 그의 문재를 인정받았다. 1545년 을사사화. 소윤과 대윤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많은 관료들이 유배되거나 처형되었다. 민심은 흉흉했고 많은 인재와 학자들은 초야에 묻히거나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것이 당시 선비의 의리요, 풍류였다. 을사사화의 시대를 지나며 27세에 진사에 합격하지만 문과를 거부하고 시인으로서 당대의 문인들과 교유하며 명산대찰을 떠돌았고,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울분을 붓에 담아 위안을 삼았다. 방랑시인 김삿갓보다 300년 가량 앞선 유랑시인이었던 셈이다.

스물에 혼인을 하지만 첫 부인은 2년 만에 사별하고 만다. 스승의 딸과 스물넷에 재혼한 옥봉은 옥천면 대산리 원경산 옥봉 아래 만취당과 옥산서실을 짓고 은자의 풍류를 즐겼다. 뒷산 봉우리 옥봉(玉峯)은 그의 호다. 옥봉은 산에 묻혀있는 것이 아니고 산에 솟아 있었다. 그의 몸은 초야에 있었으되 그의 문장은 국내는 물론 중국에 까지 전해질 정도로 자자했다. 옥봉은 36세(1572년 선조5)에 노수신의 청으로 백의(白衣) 제술관이 된다. 조선에 명나라 사신 한세능과 진삼모가 왔을 때 '성 위를 날아가는 까마귀 모두 돌아가려하는데 /자리 주위에 흐르는 강물은 무정하게 흘러가네/' 하고 즉흥시를 지으니 사신들이 감탄을 하며 '백광선생'이라 불렀다. 한번은 청나라의 사신 주지번이 옥봉을 만나기 위해 해남까지 와서 옥봉이 어려서부터 사용하던 옥산서재를 옥산서실(玉山書室)이라 이름 짓고 현판을 걸어주었다고 한다. 지금 옥산서실은 사라져 없고 마을 뒤편 언덕마루에 터만 남아 있다.

41세에 생계를 위해 '선릉참봉'을 제수 받고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다. 44세에 박순의 후원으로 '예빈사 참봉겸 주자소도감 감조관'으로 한석봉과 함께 일했다. 감조관은 필법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서 뽑았는데 옥봉은 문장뿐만 아니라 필법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의 초서는 해남 옥산서실의 유물관에 목판으로 보관되어 있다. 장흥 부춘정 아래 강가 바위에는 옥봉의 초서체로 '龍湖(용호)'가 음각되어있다.

신분제 사회에서 시는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사대부들이 송시(宋詩)를 써서 정략적으로 이용하자 삼당은 당시(唐詩)로 백성의 삶을 노래했다. 이들은 박순의 문하에 출입하면서는 당풍을 배워 당시의 풍격을 지닌 삼당시인이란 칭호를 얻게 된다. 그러나 옥봉을 비롯해 그들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옥봉과 동문수학한 영암출신 고죽 최경창은 기생 홍랑과 애절한 사랑으로 유명하다.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넘어 로맨스를 꽃피운 고죽과는 이후백 문하에서 수학할 때부터 평생 두터운 우정을 지켜왔다. 허균의 스승으로 알려진 손곡 이달은 충청도 홍주에서 관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벼슬길이 막힌 울분을 시문으로 달랜 이달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은거하고 말년에는 허균과 허난설헌을 가르쳤다.

또 고죽, 손곡 못지않게 절친한 교우가 있었으니 식영정 가단의 주인공 송강 정철이다. 석천 임억령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고 옥봉이 서울에서 외로운 생활을 할 때 송강은 좋은 벗이 되어주기도 있다. 20여년 지기였던 이들은 호방하고 쾌활한 성품으로 막역한 사이였다.

불세출의 문장가로 당대를 풍미하던 옥봉은 또 그만큼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었던 것이 특징이다. 당대에 이름이 있는 인사나 문장가들과는 대부분 문우관계 또는 사우관계를 맺어 나갔으며 이러한 교유는 그의 생애와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들 진남이 모아 펴낸 <옥봉집>에 나타난 그의 시에는 순간적으로 포착한 삶의 단면들이 달관한 듯 그려져 있다. 그리움과 이별의 정한, 회고를 통한 인생무상, 세속에 초연한 경지 등 애틋한 향수와 인간미 넘치는 감성들이 아름다운 시어로 남아 전한다.

옥봉은 46세에 벼슬길 6년을 마감하고 서울 집에서 운명했다.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선조는 영여(靈與)를 하사하여 서울에서 해남까지 옥봉의 영정을 운반할 때 사용했다. 장례책임자로 율곡 이이가 임명돼 한양에서 전주까지 운구 행렬을 직접 관장했고,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송강은 전주에서부터 운구를 몸소 받들고 해남까지 동행했다. 옥봉은 해남 북평면 해림산 중턱에 안장되었다. 해남 송산리에는 옥봉사 사당과 옥봉강당이 있고 유물관에는 1991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1호로 지정된 옥산서실소장품 일괄 9종 113점이 보관되어 있다.

해남 옥산서실을 나오는 길, 지천으로 매화가 만개했다. 동백꽃은 모가지 채 낙화하여 땅이 불긋불긋 하다. 버들가지에는 연초록의 물결이 일어 봄 색과 봄 향이 길가에 가득하다. '봄 산에 고사리만 보아도 돌아가고 싶은 것을 어찌 하리오'(백광훈) 들의 나물 하나에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얹혀 있다. 그것이 그리움이고, 그것이 시다.

box기사

하루는 옥봉이 마부가 되고 하루는 백호가 마부가 되어

옥봉의 교유관계에서 백호 임제와 사이는 유달리 밀접하고 호방한 내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백호가 누구인가. 평안도도사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송도에 이르러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을 따르며 시를 지었다는 풍류남아가 아니던가. 옥봉과 백호는 말 한필로 전국을 유랑하면서 방랑의 세월을 보낼 때가 많았다. 하루는 옥봉이 마부가 되고 하루는 백호가 마부가 되었다. 이들이 관동팔경을 유람하고 개성에 들렀을 때 이야기다. 해가 어느덧 서산에 걸리자 할 수 없이 남의 집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이날은 옥봉이 마부였으므로 옥봉이 하인 행세를 하였다.

"주인 어른을 모시고 한양가는 길인데 하루 쉬어갈까 합니다."

"집은 누추하지만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이날 마상객인 임제는 주인이 거쳐하는 사랑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고 옥봉은 하인들과 함께 자게 됐다. 저녁상을 물리자 사랑채에서 주인으로부터 건너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하인치고 글 잘하는 이가 너 말고 또 없으란 법도 없겠지만 오늘 밤을 묶게 해주신 주인 어르신의 은덕에 보답하는 뜻에서 시를 한 수 지어보아라. 운자는 서울京이다."

임제의 익살스런 제안을 이해하고 있는 옥봉은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왕희지 필법으로 즉시 시를 써 내려갔다.

"한양으로 돌아가는 나그네 개경을 지나는데/ 만월대에는 인적조차 없고/ 냇물만 성을 둘러 흐르고 있구나/ 오백년 도읍지의 일은 가련키만 하고/ 사람은 간데없고 청산만 푸르러/ 두견새 소리 무성하네"

물줄기 흐르듯 척척 들어맞는 이 문장에서 주인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배로다, 전라도에서 백옥봉과 임백호가 글자한다고 소문은 들었지만 이처럼 글자하는 하인은 처음봤다."

"주인 어르신 죄송합니다. 이 사람이 백옥봉이고 제가 임백호 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주인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고 반가워하며 그날 밤을 유쾌하게 지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안타깝게 옥봉과 백호는 당시의 문장을 후대에 많이 전하지 않고 있다.

옥산서실

사당 옥봉사

옥봉 백광훈 선생 영정_사진 백옥연

옥봉사 앞, 옥봉 백광훈 선생 행장비.

옥봉선생백공유허비(玉峯先生白公遺墟碑)_사진 백옥연

장흥 부산면 부춘정 아래 탐진강 바위에 음각된 옥봉 백광훈의 글씨 용요(龍湖)

장흥 부산면 부춘정 아래 탐진강 바위에 음각된 옥봉 백광훈의 초서로 쓰여진 용호(龍湖)

중국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를 옥봉이 초서로 쓴 것을 목판으로 만들었고 이 목판을 탁본하여 병풍으로 제작. 글씨 옥봉 백광훈_사진 백옥연

해남 가는길 흐드러진 춘삼월 매화

해남 옥사서실 유물관_1991년 7월19일 전남도지정문화재 제181호 옥산서실소장일괄 옥봉 백광훈의 유물과 유품이 9종113점이 보관되어 있다. 사진 백옥연

해남 옥산서실 가는길 남도의 붉은 황토밭

선조임금이 하사한 영여(靈輿)_ 옥봉 선생이 한양에서 돌아가시자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선조 임금이 직접 하사했던 것으로 서울에서 해남까지 옥봉의 영정을 직접 운반할 때 사용함. 길이 243cm(몸체 65cm) 높이 77cm 폭 50cm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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