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연의 문향(문향), 가다가 멈추는 곳>나주 송재서원_희민공 송재 나세찬
우의정 김안로에게 책하느니 “그대는 간신이로다!”||미관말직의 서생이 ‘사생취의(捨生取義)’를 행하다.
입력 : 2020. 02. 27(목) 13:23

나주시 문평면 동원리에 위치한 송재서원 전경_사진 백옥연

책문(策問). 왕은 묻고, 신하는 답하는 군신의 정치토론. 당대에 가장 시급한 정책에서부터 정치, 문화, 개혁, 인사, 국방, 외교, 교육, 혁신에 이르기까지 한 국가가 당면한 온갖 현안에 대하여 임금이 물으면 신하는 원칙과 소신에 따라 거침없이 답하는 자리였다. 책문은 시대를 묻는 것이었으며, 그 문답에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혜와 통찰을 얻고는 했다. 또는 통치권자와 세상을 향해 정의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자리이기도 했다.

1534년(중종29), 정3품 당상관 이하 문신들에게 시국을 묻는 시험이 있었다. 책문은 예양을 높이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방안을 묻는 예양책(禮讓策)이었다. 당시는 김안로가 우의정에 있으면서 정적을 제거하는 권력의 횡포가 절정에 이를 때였다. 이때 죽음을 각오하고 쓴 통렬한 글 한편이 올라왔다.

"지금 조정은 편당을 짓고 서로를 배척하는데 겨를이 없고, 각처의 원한을 머금은 사람들이 후일에 어지러운 원인이 됨을 알지 못하니 어찌 조정의 화평을 바라겠나이까? 전하께서 만약 불공(不公) 부정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면 조정은 불화가 그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어찌 지록(指鹿)의 간사한 자가 홀로 진(秦)나라의 2세의 조정에서만 나오겠습니까?"(생략)

서슬 퍼런 직언이다. 권력의 권간(權奸)이 국정을 농단하면 조정 불화가 문제가 아니라 사직이 위태롭고 국가가 망하고 말 것 아니냐는 말이다. 진나라 환관 조고(趙高)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며, 황제 호해(胡亥)를 농락하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여기에 나온다. 누가 봐도 환관 조고는 김안로를 빗댄 것임을 알 수 있었으니, 당사자가 그것을 모르겠는가. 김안로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고, 그의 수족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의금부가 즉각 이 대책문을 쓴 주인공을 잡아들였으니, 송재 나세찬(羅世纘,1498∼1551)이었다. 그것은 2,050자에 이르는 긴 글로, '지록지간'이 들어있는 15자(豈特指鹿之奸 獨出於二世之朝政乎)가 그를 옥죄어 든다. 나세찬은 의금부 옥에 갇혀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살점은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부러지면서 뼈가 으깨져 나왔다. 그 와중에 부서진 뼛조각을 부모님의 유체라 버릴 수 없다며 차고 다니던 주머니에 담아두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송재는 연산군 4년 나주 거평면(문평면) 남산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금성, 자는 비승, 호는 송재, 시호는 희민이다. 아버지는 생원 나빈(羅彬)이고, 어머니 해평윤씨는 찰방 윤노겸(尹勞謙)의 딸이다. 집이 가난하여 항상 관솔에 불을 놓아 새벽까지 글을 읽었다고 한다. 독학으로 경전과 사서를 달통하여 1528년(31세)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5년여를 나주, 황주향교 훈도를 지내다 조정의 문턱을 겨우 넘어 예문관 검열에 부임했다. 1536년(중종 31) 문과 중시(重試)에서 예양책(禮讓策)으로 장원했다. 그러나 그 글이 권신 김안로를 통렬하게 비판하여 문제가 된 것이다.

'일찌기 생(生)도 원하는 바이고 의(義)도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없다면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는 것은 맹자의 말이다. 사생취의(捨生取義), 말 그대로 의는 얻었으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밤중에 사력을 다해 쓴 '옥중혈소'로 그는 죽음을 면하고 경북 고성으로 유배를 갔다.

집이 가난하면 귀양살이도 가난하다.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이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문으로 빈궁과 고통을 이겨냈다. 충신(忠信)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붙여 놓고 마음에 새겼다. 나세찬은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수신과 학문에 정진하며 귀양의 시간을 보냈다.

권력은 영원하지도 않고 부운(浮雲)처럼 무상한 것이다. 그것을 권력 밖에 있을 때는 알지만, 권력 안으로 들어가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이다. 1537년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인과 대사헌 양연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사사되었으니, 김안로의 죽음이다.

나세찬은 유배에서 풀려 예문관으로 돌아온다. 중종 23년 41세에 탁영시(擢英試)에 다시 한 번 장원을 하였다. 홍문관 수찬,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예조정랑, 병조정랑 등 조산대부 품계에 올랐고 그의 벼슬길은 탄탄대로였다. 44세에 홍문관 교리로 호당에 들어가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금호 임형수, 임당 정유길 등과 같이 벗하며 글을 읽었다.

중종 죽음 이후 전개된 정치 상황은 최악의 시기였다. 예로부터 선비는 다스려지면 벼슬하고 어지러우면 물러난다 하였다. 1545년 그는 대사간이 되었는데 그때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체직을 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살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 일파는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일파를 제거한다. 대사간으로서 을사사화로 화를 입은 백인걸, 유희춘, 정황을 구하려 하였다. 매번 체직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인종의 신위를 문소전에 모셔야 한다는 일과 관련해 지방관으로 밀려났다.

전주 부윤으로 있던 명종 6년 54세에 막내아들 열이 죽었다. 참척의 상심에 국사의 근심이 겹쳐 병이 되어 관아에서 그해 6월 14일 숨을 거두었다. 전주 온 고을의 사민들이 슬퍼하고 조정에서는 예조정랑이 조문하였다. 숙종 28년(1702) 사림이 나주 송림산 서쪽에 사우(사당)을 세웠고, 철종 14년(1863년)에 희민(僖敏)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나주 문평면 문평로 동원마을 송재서원 가는 길. 송재공 17세손 나근채 회장(72), 나승용 총무가 동행하고 있다. 이 서원은 송재 나세찬의 학덕과 충의를 기리기 위해 1702년(숙종 28년)에 건립했다. 이후 부제학 제주목사 등을 지낸 금호 임형수,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에 참여한 체암 나대용, 고종 때 훼철 후 1925년 사담 나덕원, 창주 나무송, 구화 나무춘 등 6인이 배향되어 있다. 외삼문 지경문, 강당인 강수재와 내삼문, 사우 송재사, 관리사로 이루어져 있다.

나회장은 "송재 선생이 쓴 유묵판 24매는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고 현재 백호문학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유묵판, 주련, 사백정 현판이 있는데 그곳에다 별도로 송재 전시실을 마련해서 고문서나 문집도 추가로 전시하면 좋겠다는 것이 문중의 소망입니다." 라면서 또한 송재서원이 전라남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당 송재사 앞 배롱나무는 1702년 숙종 때 서원 신축과 함께 심어진 것으로 우리나라 배롱 나무 중 가장 굵은 것 중 하나라고 한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6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듯 하다. 그의 묘소로 가는 길에 좋은 나무들이 많다. 천연기념물로 지정해도 될 만한 호랑가시나무, 오른쪽 주변에 비자나무 두 그루와 동백나무 숲이 예사롭지 않다. 묘소 앞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독야청청하다. 청백송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송재 선생을 닮은 듯 높게 솟은 그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box기사

병든 잣나무를 슬퍼하노라

애병백부(哀病柏賦)

내 온갖 꽃의 시들어짐을 남모르게 슬퍼하며

조화의 덧없음을 괴로워한다네.

저 분분한 상수리나무는 오래도록 살아가고

오수나무들이 또한 송죽을 어지럽히려 하네.

세한의 절개를 옛말에서 들었으니

군자의 아름다운 기절에 의지하려 함은

어디서 찾을손가,

산모퉁이의 휘휘한 곳에서

앙상히 말라서 홀로 서 있음을 놀라와 함이로다.

어이타 만물 중에 무거운 영기조차 헛되어

수많은 나무들 속에서 시달리는가

(중략)

겨울의 끝자락, 늦은 2월에 겨우내 소식이 없던 눈이 펑펑 내렸다. 산야의 쌓인 눈은 '세한'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뜻으로 논어 <자한편>에 나온다. 송백은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한다. 추사의 <세한도>에 잣나무, 소나무, 그리고 작은집 한 채가 있다. 조선 전기 문신 이행은 거제도로 유배되었을 때 작은 정자를 지어 '세한정'이라 하여 송백의 뜻을 새겼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만주 뤼순 감옥에 수감 중 이 글을 정성스럽게 옮겨 적어 유묵으로 남겼다. 이렇듯 많은 선비들은 송백을 소재로 글을 짓고 글을 쓰고 그림에 담아 마음을 표현했다.

1522년 봄, 25세의 송재는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병든 잣나무를 애도하는 76구의 긴 애병백부(哀病柏賦)를 지었다. 통절한 마음이 은유와 환유를 따라 강물처럼 흐르는 글이다. 1519년 기묘사화, 1521년 신사무옥의 참화를 거치며 희생되거나 좌절하고 실의에 빠진 사림들을 병든 잣나무로 비유했다. 그러나 다시 살아서 사시사철 푸르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나세찬은 탁월한 문장가였다. 특히 논(論), 책(策), 소(蔬)문에 뛰어났다. 그의 문학 작품이 많지는 않다. <송재유고>에 수록된 작품은 한시 23수, 부 25편 사1편이다. 그는 감성보다는 이성적이었고, 시적 상상보다는 논리적인 글이 많다. 그는 부를 즐겨 지었다. 부(賦)는 학문, 수양, 도덕 ,정치, 시사 사상 등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사당 송재사에서 내려다 본 강수재의 동백

송재 나세찬 선생 위패

송재서원 강당 강수재와 사당 송재사

송재서원 내삼문

송재서원 사당 송재사_송재 나세찬, 금호 임형수, 체암 나대용, 사담 나덕원, 창주 나무송, 구화 나무춘 6인이 배향되어 있다.

장명등 너머 청백송이 홀로 쓸쓸하다.

장명등을 통해서 본 송재공 묘역 일원

증자헌대부이조판서대제학행대사헌송재나선생세찬지묘_사진 백옥연 (2)

사당 송재사 앞의 배롱나무_조선 숙종 28년(1702년) 당시 건물 신축과 함께 심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배롱나무 중 가장 굵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의 꽃피는 모습을 보고 풍.흉년을 점치거나 혹여 가지가 손상되면 마을에 흉사가 생긴다고 하여 특별히 잘 보호해 왔다고 한다.

송재공 묘역에 세한의 청백송이 독야청청하다._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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