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광주 포충사(褒忠祠)_충렬공 고경명
풍전등화의 조국을 위해 격문을 토하는 고경명||삼부자가 의병으로 나서 순국한 노블리스오블리주의 표상
입력 : 2019. 12. 26(목) 15:40

광주광역시 남구 압보촌 제봉산 아래 위치한 포충사_1592년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제봉 고경명, 준봉 고종후, 학봉 고인후, 월파 안영, 청계 유팽로 배향함_사진 백옥연

"아, 여러 고을 수령들과 각 지방의 선비와 백성들이여!

충성하는 자가 어찌 나라를 잊겠는가.

마땅히 목숨을 버릴 것이다.

혹은 무기를 제공하고, 혹은 군량을 내놓으며,

혹은 말을 달려 선봉에 서고, 혹은 쟁기를 버리고 논밭에서 떨쳐 일어서라.

분발하여 힘닿는 대로 모두 다 의를 위하여 나선다면

우리나라를 위험 속에서 구해 낼 것인즉

나는 그대들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할 것이다." '고경명의 마상격문 중에서'

격문은 토(吐)한다고 하더니, 왜 토한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저 바람 부는 들판에 서서 범이 포효하듯,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상에서 백발을 휘날리며 이 결의에 찬 격문을 토하는 자, 누구인가. 그 썩어빠진 '조선의 선비'가 아니라, '마땅히 목숨을 버릴 것'이라는 격문처럼, 풍전등화의 조국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서 그의 자식 둘과 함께 목숨을 버린 사람. 1592년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 4월13일, 부산포 앞바다를 검게 덮은 왜군은 부산성을 함락시키고 거침없이 북상하여 개전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한다. 임금은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서도(西道, 평안도)로 피난길에 오르고 성난 백성은 궁궐에 불을 질러 한양은 불바다가 되었다. 그야말로 조선은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변했고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긴박하던 때에 피 끓는 격문을 토(吐)한다. 왜적이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을 도륙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가슴을 치던 선비와 백성들을 구국의 깃발아래 모이게 한 격문. 예순의 노선비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쓴 격문을 듣고, 의주로 피난 간 선조를 호종하던 한음 이덕형은 밥을 먹다 저절로 수저를 던지며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 나라 사랑과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에 나가는 심정의 그 문장은 바로 최치원의 '황소격문', 제갈량의 '출사표'와 더불어 3대 격문으로 꼽히는 고경명의 '마상격문'이다. 백발의 의병장 고경명은 스스로를 '부유(腐儒)'라 했지만, 그가 쓴 혼신의 문장은 조선을 울리고 마지막 남은 호남을 구해내는 불씨가 되어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제봉 고경명(1533~1592)은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과 남평 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기묘명현의 한사람인 고운(高雲)이다. 호는 제봉 또는 태헌이며 본관은 장흥, 시호는 충렬이다.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호조좌랑, 세자시강원 사서, 형조좌랑, 지제교 등에 제수 되고 호당에 들어 글을 읽었다. 아버지 고맹영과 장인 김백균은 당시 인순왕후 외척이던 이량과 같은 파로 지냈다. 장원급제 출신으로 승승장구하던 제봉은 31세 홍문과 교리로 있을 때 이량의 전횡을 논하는데 참여, 그 경위를 장인에게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곧 파직 되었다. 고향 광주로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하고 당시 호남 가단의 명유들과 어울리며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스승인 송순의 면앙정을 노래한 '면앙정 삼십영'을 김인후,임억령과 함께 지었다. 김성원, 임억령, 정철과 함께 '성산사선(四仙)'으로 불렸다. 광주목사 임훈과 무등산을 유람하고 수려한 경관을 읊은 기행문 '유서석록'을 남겼는데 명문으로 회자된다. 낙향 19년 만에 영암군수로 벼슬길이 다시 트였다. 종계변무사 황강 김계휘 추천을 받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 문장을 빛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문필가로 칭송받았던 그가 의병장으로 순절하여 그의 충절만 부각이 되고 문인으로서 명성이 덜한 대목은 아쉬움이 있다.

고경명은 각 도, 열읍에 격문을 돌리고, 30일 만에 임진왜란 사상 최대 규모의 의병 6천명을 모아 유팽로, 양대박, 안영을 부장으로 삼고 진용을 편성했다. 전주를 출발하여 근왕군으로 북으로 진군하던 중 왜군이 금산을 넘어 전주로 침략할 것이라는 소식에 당초 계획을 바꾸어 금산으로 향했다. 금산전투 7월10일 운명의 날, 정병 100여기를 거느리고 서문을 공격하고 관군은 동문을 공격하는데 관군쪽이 취약한 것을 알고 왜적들이 조총을 쏘아대며 전병력으로 역습해왔다. 관군이 무너지고 도망가니 의병도 동요하고 전세가 매우 불리하였다. 이때 종사관 안영이 말 타기를 권하며 잠시 후퇴하였다가 도모하자 했으나 의병장 고경명은 '내어찌 구차하게 죽음을 피하리오, 패전 장수로서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였다. 바야흐로 적들이 이르러 덤벼드니 유팽노와 안영이 몸으로 적장의 칼을 막으면서 3인이 함께 나라를 위해 장열하게 전사하였다. 차남 인후도 무사들을 거느리고 최전방에서 화살속을 누비면서 덤벼오는 많은 적들을 죽이고 마침내 부친을 따라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학봉 고인후는 후에 의열이란 시호를 받았다.

장남 종후는 부친과 아우의 죽음도 모른채 선봉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최후까지 싸우다가 마침내 혈로를 뚫고 탈출하였으나 부친과 동생의 비보를 접하고 통곡을 하고서 부친과 동생의 시신을 겨우 찾아 숲속 산사에 가매장하였다가 나중 화순 흑토평으로 장사지냈다. 이때 그를 추모하는 의병들의 곡성이 고요한 숲속을 진동하고 가까운 지방 사민들의 슬피우는 소리가 시냇물 소리와 더불어 그칠줄을 몰랐다. 비록 금산성 탈환은 실패 하였으나 전주로 진출하는 적에게 적지않는 타격을 주었고 호남지방을 왜적으로부터 지키는데 큰 몫을 하였다.

그 후 장남 고종후는 상복을 입고 복수의병장으로 경남 진주로 나아갔다. 2차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진주 삼장사'로 북쪽에 재배하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효열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고경명의 동생 고경신은 제주에서 군마를 구해오다 풍랑을 만나 죽었다. 고경명의 또 다른 동생 고경형도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둘째 딸과 조카딸은 정유재란 때 자결함으로써 왜군에 맞섰다. 고경명의 집안에서만 남녀 7명이 순절했다. 이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주는 봉이와 귀인까지 합하면 9명이다. 조선 역사에 이런 가문이 없다. 조정에서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로 7명을 정려하였다. 1충은 고경명, 3효는 장남 종후, 차남 인후, 손자 부금, 2열은 딸 노상룡의 처와 질부인 거후의 처 광산정씨, 1절은 동생 경형이다.

고경명은 친필 좌우명으로 '세독충정(世篤忠貞)'을 남겼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로, '대대로 독실하게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그의 삶이 그 글귀와 같다. 삼남 순후와 손자 부립, 부천은 이괄의 난 정묘,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다. 11대 후손 춘강 고정주는 호남 최초 근대학교인 창흥의숙과 영학숙을 통해 위로부터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2대 후손 녹천 고광순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촉발한 1차 의병, 을사보호조약인 2차 의병을 주도하고 1907년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일본군조차도 그를 '호남의병의 선구자', '고(高)충신'이라 불렀다. 아는 것을 실천하고 행동한 참 선비의 표상, 고경명의 정신은 후대로까지 이어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오늘에 이른다.

광주 남구 포충사, 임란 후 1601년에 광주 제봉산 아래 사우를 건립하고 포충사(褒忠祠)라 사액되었다. 사당의 주벽에 고경명을 배향하고 우측에 고종후· 유팽로, 좌측에는 고인후· 안영을 배향하여 충절을 기리고 있다. 포충사는 고종의 서원 훼철 때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더불어 훼철되지 않은 광주·전남 2개 서원 중 하나다. 1978년에서 1980년 사이에 사회정화사업으로 새로운 사당을 지으면서 강당인 충효당, 청사영당, 전사청, 고직사 등을 철거해버렸다. 구사당과 동재·서재는 당시 유림과 마을 노인 분들의 치열한 반대로 본래 위치에 원형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왼쪽 구 사당으로 오르는 홍살문 옆엔 '충노봉이귀인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라고 적힌 자연석이 서 있다. 고경명의 가노로서 금산전투에 의병으로 참전하여 고경명과 차남 인후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 지냈고, 이듬해 다시 고경명의 장남 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 왜적과 싸우다가 주인과 함께 순절했다. 난리를 당해 신분을 초월한 자기희생을 기리기 위해 새긴 비이다. 사대부의 사당 안에 노비를 위한 비석을 세워둔 곳을 볼 수 없었는데, 아직도 제사를 지내주고 충심을 기리는 애틋한 마음이 느껴진다.

명나라 참군 여응종은 조선록에서 '금산 싸움에 아비는 국가를 위해 죽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죽고, 군사들은 의리를 위해 죽었으니, 이 한 싸움에는 충신, 효자, 열사가 모두 있었다.'라고 하였다. 한 나라에 삼부자가 부조를 받고 과거급제한 문신임에도 국가의 위기 존망에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일, 한말 의병운동에 이르기까지 대대손손 충·효·열의 세독충정을 보인 가문이 조선 천지 어디에 있을까? 그 정신이 오늘의 우리, 지금의 광주를 오롯이 존재하게 한 뿌리가 아닐까 싶다.

관련 박스기사>>>>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과 재산을 초개처럼 여긴 두 집안의 이야기

제봉 고경명의 묘소는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오동촌 제봉산 아래 있다. 묘소 입구에는 윤근수가 찬한 신도비가 있다. 묘소 오르는 길 쪽으로 나뭇잎을 벗어버린 회화나무가 제봉의 충절의 정신을 보여주듯 황금색 가지를 뽐내며 하늘로 뻗어 있다. 가운데에 고경명과 부인 울산 김씨 부부의 묘가 있다. 아래 좌측에는 막내아들 청사 고용후와 행주 기씨 부부의 묘가, 우측에 장남 고종후의 부인 고성 이씨의 단묘가 눈에 띈다.

고성이씨는 경복 안동에 있는 임청각의 이복원의 큰 딸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 먼 안동과 광주에서 혼인을 하게 되었을까? 조선 건국 무렵부터 개경과 한양 등지에서 활약한 두 집안 조상들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준봉 고종후는 첫째 부인이 죽고 안동의 고성이씨와 혼인을 하였다. 그 당시 지체 높은 가문에서 딸을 재취로 보낸다는 것이 상상이 안가지만 두 집안 사이에는 그만큼의 신뢰가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1591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면서 귀향길에 오른 고경명은 환갑을 맞이한 사돈을 만나러 안동에 들러 며칠 머문 뒤 '臨淸閣(임청각)'이라는 제목으로 사돈집의 후한 대접과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을 읊은 칠언율시를 남겼다.

준봉이 진주성 전투에 나간다 하자 적의 난리를 피해 안동 친정에 가 있던 이씨부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온다. 준봉은 이미 절양루 아래서 군사 훈련을 시키고 있었고 부인은 몸종을 보내 한 번 상면하자고 간청했으나 '내가 벌써 군중에 와서 있으니 군무를 버리고 갈 수 없다'하고 만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씨부인은 몸종을 시켜 7살 5살 두 아들은 데리고 가서 작별인사를 하도록 했다. 두 아들을 양쪽 무릎 위에 앉히고 등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옷을 벗어 부인에게 전해주도록 하고 그만 빨리 가라고 하자 두 아들은 영영 이별임을 알고 우니 주변에서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고성이씨는 자식과 시댁 식구를 데리고 친정인 안동에 피난을 가기도 했다. 장흥 고씨 집안 삼부자의 의로운 죽음이 있은 뒤 300년, 광주에서는 고광순을 비롯 의병과 계몽교육으로 구국활동을 하였고 안동에서도 을미사변, 단발령 등 일본에 맞서 고성 이씨 집안사람들이 의병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특히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은 경술국치 이듬해, 전 재산을 처분한 뒤 식솔을 이끌고 만주 망명길에 올라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여생을 바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이렇듯 국난 극복의 선봉이 돼 온 두 집안은 호남과 영남이라는 지리적 거리, 서인과 남인이라는 정치적 거리를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돈독한 우의로 교류를 하고 있다.

구사당 포충사 동재 _사진백옥연

구사당 포충사 서재_사진 백옥연

구사당 포충사에 오르는길의 소나무_사진 백옥연

구사당에서 내려본 신사당 포충사

담양에 있는 상월정_춘강 고정주는 제봉 12대 손으로 위로부터 계몽운동으로 구국운동을 하였으며 이곳에서 최초 영어.산수 등을 가르쳤다.

묘소 오르는길 황금가지의 회화나무가 인상적이다_사진 백옥연

제봉의 12대손 녹천 고광순의 순절비. 연곡사에 있다. _사진 백옥연

제봉의 후손 춘강 고정주가 위로부터 계몽운동에 의해 영어 수학 등 신학문의 교육장소로 운영했던 신학문의요람 담양 상월정_사진 백옥연

충노봉이귀인지비_봉이와 귀인을 기리는 비

충렬공 고경명의 마상격문_사진 백옥연

포충사 구사당 영역_사진 백옥연

포충사 구사당 좌우는 동재 서재_사진 백옥연.

포충사 내 백일홍 나무_굳건한 충열을 상징하는 듯 하다_사진 백옥연

고경명의 신도비문_장성군 영천리 소재 _사진 백옥연

구사당 포충사의 문

충렬공 제봉 고경명 선생 영정_사진 백옥연

포충사 신사당 전경_사진 백옥연

호남순국열사지비구사당 앞에 있다. _백옥연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

백옥연의 문향 최신뉴스더보기

실시간뉴스

많이 본 뉴스

기사 목록

전남일보 PC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