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바람은 불고 낙엽은 진다. 산길에 낙엽들이 쓸려 다니니, 세상천지가 소슬하다. 다 놓아버릴 것처럼 끝으로 이어지는 길. 그 끝에 문이 있다. 하현달이 산문을 비추고 있다. 하나 둘 사람들이 산문을 향해 모여들고 있다. 급한 걸음들, 울음을 머금은 애통한 발걸음들. 조상치 사부자(四父子)는 영천에서, 송간은 여산에서, 이맹전은 선산에서, 정보는 연일에서, 조여는 함안에서, 권절은 안동에서 왔다. 정지산과 성회, 엄홍도 부자(父子)는 날을 앞당겨 왔다. 사람들이 부복하고 애통한 목소리가 산사에 울려 퍼지니.
'물은 곱고 산은 깊고 달은 밝사오니 하늘에 납시신 임금의 영현이시여 내림하사이다. 가엾으신 성은이 망극 하옵기에 석철을 본받아 임금의 의관과 궤장을 갖추어 단을 모아 제사 지내오니 회계산 위에 대우사의 제사의식을 인용함이로소이다. 산과와 천어를 차려 추부를 곡하며 눈물로 혼을 부르옵나니, 비록 예는 미흡하오나 의리는 있사옵기에 감히 청하나이다. 흠향하옵소서.'
갈건과 베옷을 입은 퇴관과 포의(벼슬이 없는 선비) 한 무리는 북녘하늘을 우러르며, 곤룡포를 받들고 고복(초혼하고 발상하는 의식)을 마친다. 김시습은 직접 지은 초혼사를 울면서 읽고 있다. 임금, 가엾으신, 망극, 눈물…예는 미흡하오나 의리는 있다는 말,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언어들. 임금은 누구이며, 갈건야복 차림으로 복상하는 이는 또 누구인가? 종묘가 아닌 이 초라한 산사에서 가을 깊은 밤, 남 몰래 흠향을 간청 받는 이 초혼은 누구의 혼이기에 이다지도 애처로울까?
계유정난((1453년10월).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 김종서 등 수십 명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허울뿐인 것이었다. 죽거나 산 사람들이 생육신 사육신이 되었고, 가족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단종은 영월로 유배된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계획이 또 발각이 되어 한 달 뒤 사사되었다. 영월 호장 엄흥도와 차성복이 사람의 눈을 피해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 사람들이 단종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계룡산 동학사에 모셔두고 초혼제와 함께 일 년에 두번 제를 올렸다. 단종이 영월 청룡포에 유폐되었을 때도, 사사되었을 때도 퇴관들은 저마다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다. 충을 다하여 갈건야복을 고수했고 마음을 다하여 복상하였다. 의(義)는 무겁게 여겼고, 명(命)은 가볍게 여겼다. 그들은 무겁게 여길 것과 가볍게 여길 것을 구분할 줄 알았고, 충(忠)이 무엇이고 신(臣)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훗날 조선의 시간에서 빛나는 한 순간으로 기록되어 마땅한 일이다.
동학사 단종의 초혼제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순조 때 동학사를 해체·복원하면서 대들보 속에 숨겨져 있던 기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세조의 권세에 눌려 아무도 이야기 할 수 없는 참담함을 초혼제에 참여했던 명선들이 기록하여 동학사 대들보 속에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이 초혼제에 참여했던 사람들, 김시습, 조상치, 송간, 조여, 정지산, 이성희, 이축을 '단조초헌칠현신'이라 일컫고, 여기에 엄흥도를 더해 '팔절'이라고 숭상하고 있다. 동학사에는 이와 관련 초혼각, 숙모전이 있고 현재 고흥 재동서원에 <단조초혼칠현신비>가 건립되어 있다.
가을도 끝으로, 한 해도 끝으로 가는 11월에 고흥으로 가는 이유는 그 때 동학사에 복상하고 있던 서재 송간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나는 벌교 교차로를 지나 재동서원과 서산정을 찾았다. 재동서원은 대서면 화산리에, 서산정은 재동서원이 바라보이는 동강면 마륜리 마서 마을에 있다. 마륜촌은 새머리 형국의 봉두산 자락이 마치 말이 달려가는 형국으로 말안장 아래에 해당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송간의 호 서재(西齋)는 마륜리 서쪽 언덕의 집을 가리킨다. 마서마을에 송간의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각의 출입문은 잠겨있고, 밖에서 들여다보니 '충강공 서재 송선생 유허비' 각인이 갈색으로 말라버린 넝쿨 사이로 보인다. 마을길을 따라 뒷산으로 오르면 푸른 대숲 사이에 송간이 은거했다는 작은 정자 서산정(西山亭)이 있다. 물론 지금은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져 있다. 멀리 고흥만이 바라보이고, 건너편 서재골에 정갈한 건물이 내려다보인다. 송간의 7세손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절한 호남창의별장 송대립과 그의 3남 송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송씨쌍충정려(지방기념물 제110호)'가 있다.
재동서원은 처음 1785년 송간, 유탁, 정운희, 송대립, 송침 5위를 향사하여 운곡사를 시작되었다. 10년 뒤 위차 문제가 있었으나 송간에게 시호가 내려졌기에 단독사우로 재동사라 칭했다. 그 이후 육충사(1801)-세충사(1833)-충강사(1956)-재동서원(1965)내에 창효사(1980)의 추가건립까지 배향인물 변경과 명칭변경이 있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는 44위의 충열(忠烈)을 기리는 '여산송씨충강공후손임란공신추모비'가 있다. 44충열이라 함은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선무원종공신녹권을 받은 사람이 20위, 녹권은 없으나 크게 공을 세운 분이 24위이다. 왼편으로는 재동서원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커다란 충효(忠孝)비가 서있다. 외삼문(진수문)을 들어서면 동재(구인재)·서재(명의재)가 있고 내삼문을 들어서면 서재 송간, 매월당 김시습을 주벽으로 송대립, 송심, 송순례, 송희립, 송건 등 임·병난 충신 9위가 배향된 서동사와 사우 경내를 확장하여 효자 4위를 배향한 창효사를 별건하였다. 그리고 경효재를 강당으로 살리고 내삼문(양호문)은 그대로 두는 등 각각의 기능에 맞게 배치를 하였다. 유물관 앞에는 그동안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단종 초혼제에 참여한 <단조초혼칠현신사적비>가 있다. 1868년(고종5년) 서원 철폐령 직후 서동사는 물훼령(勿毁令)의 교지가 있었으나 이미 훼철된 후라 아쉽게 여겼으나 1956년 현 위치에 복설하였다.
재동서원 서동사에 배향된 인물 중에서 단연 여산 송씨 고흥의 입향조이면서 단조초혼칠현신인 충강공 서재 송간(1405-1480)이다. 조선초기의 충신으로 세종·문종·단종 3조를 섬겨 벼슬이 형조참판, 가선대부에 올랐다. 단종 비였던 정순왕후는 송현수의 딸로 여산 송씨 가문이었다. 송간은 1455년 단종의 명으로 팔도도진무사로서 호남지방을 순무하던 중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관직을 버렸다. 고향인 여산에 내려가 있다가 단종이 영월로 쫓겨나자 사촌 동생 둔학 송경원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영월로 가서 자규루에 오른 단종을 만나 통곡과 함께 복명을 마쳤다. 그 후 다시 고향에 내려와 두문불출하였다.
1457년 10월, 단종의 훙거(薨去) 소식을 듣고, 공주 계룡산 동학사로 들어가 호장 임흥도가 거두어 온 어포로 초혼하여 김시습 등과 초혼제문하고 방상 3년상을 지냈으니, 앞서 언급한 그 일이다. 그 후 동생인 이성현감 송시, 은률현감 송희 그리고 맹유, 중유, 계유, 백유, 숙유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모두 아버지와 함께 고흥 마륜촌으로 내려왔다. 송간은 뒷산에 <서산정>이라는 띠집을 지어 숨어 지냈다. 단종을 사모하여 북향 배곡할 뿐 항상 술에 만취하여 산천을 돌아다녔다. 다른 선비들과 달리 후손이나 후학들 교육마저 마다하고 세상을 한탄하며 광인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송씨 가문에서는 문인들보다 무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실제로 후손들 가운데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공을 세운 인물들이 많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 종군했다가 선무원종 1등 공신으로 책록된 송대립·송희립 형제를 비롯하여 수십 명의 임란 공신들이 배출되었다.
송간의 충절에 대해 정조는 1972년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하고 충강(忠剛)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강공 서재 송간의 묘는 벌교읍 척령리 원동에 있으며 제각인 영보재는 1800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영보재 입구에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의 무덤 앞에 세우는 신도비가 2기 있다. 송간 선생의 행적을 모은 <서재실기>는 재동서원 유물관에 보관 중이다.
살아가면서 자기 소신에 따라 했다 하더라도, 일이 이뤄지기도 하고 꺾이기도 하고, 그 뜻이 활짝 펴지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오그라들기도 하는 것은 운명에 접하여 동행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오직 스스로 판단하여 외길로 정진하고, 실천궁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그렇게 굽히지 않고 가는 길이 자칫 목숨이 걸린 일이며, 하물며 주위사람들까지 그 폐해를 당할 일이라면 주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오늘 고흥에서 만난 송간 선생의 발자취에 존경의 마음이 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무참히 떠난 어린 영혼을 위해 잔을 올리는 일, 그것은 작은 일이지만 그 서슬 퍼렇고 엄혹했던 시절에 목숨을 내놓는 일이기도 했고, 조선의 선비정신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빛나는 이정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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