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장흥 강성서원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문위세의 一門倡義 ||가족 10명이 의병에 나서, 노블리스 오블리제 전형
입력 : 2019. 10. 24(목) 13:25

장흥군 유치면 조양리 소재 강성서원 전경

광주에서 장흥 가는 길은 세 갈래다. 동쪽으로 화순 지나는 길, 서쪽으로 영암 지나는 길, 그리고 가운데로 나주를 통하는 길이다. 같은 장흥이어도 목적지가 어디냐에 따라 다들 알아서 제 길을 가는 것이로되, 이번에 나는 가운데 길로 간다. 나주 금정 지나 유치로 가는 길이다. 쭉 가다가 덤재를 넘으면 길은 탐진강과 동행한다. 길 양옆으로 해발 2백~3백m 안팎의 고만고만한 산들이 연달아 지나간다. 아직 산이 높지 않으니, 물도 깊지 않다. 그러다가 유치 근방에 이르면 산들이 높고 험하다. 물도 제법 많아져 강폭이 넓어지고 수심도 깊어진다. 강은 가지산 보림사에서 내려오는 또 한 갈래와 만나, 탐진강을 이룬다. 물은 도도히 흘러 장흥읍을 관통하고 강진만에 이르러 바다가 된다. 강과 동행하는 10월의 길이 아름답다. 길가의 산벚나무는 벌써 나목(裸木)이다. 단풍이 일찍 들고 일찍 지는 가을의 전령이니, 그 시작을 알리고 떠난 것이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 싸리비를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다. 길에 서 있던 배롱나무의 꽃들도 지고 없다. 그 난만하던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벌써 100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갈색으로 변한 참나무 잎들, 누런 은행잎들이 바람에 우수수 지고 있다. 늦가을의 저런 풍경은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그 여름의 풍성하고 단단하고 화려하던 것들이, 낙엽이 되어 날리고 쇠락해 가고,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니. 가만히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들, 만추의 서정이 그러하다.

장흥군 부산면 춘청촌 들녘이 황금으로 물들어가던 이 무렵, 어느 집 대문 앞에 하얀 눈썹과 수염을 휘날리며 도사의 풍모를 지닌 노인이 발길을 멈추었다. 주인은 범상치 않은 이 노인을 안으로 모시었다. 함께 차를 마시던 노인은 천문과 역법에 달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집에 덕성이 내리비치고 있으니 몇 해 지나 반드시 귀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고,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것"이라고는 말하고는 집을 나서 홀연히 사라졌다. 그와 같이 1534년(중종 29) 9월 준수한 아들이 태어났으니, 풍암 문위세(1534∼1600)다. 임란 때 풍전등화에 처했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다섯 아들, 사위, 조카 노복들을 데리고 분연히 일어났던 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사람. 자는 숙장, 호는 풍암, 본관은 남평으로 성균관 진사 양(亮)과 해남윤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아버지 양은 사람이 천지 사이에 태어나 존재하는 이유가 세(世)마다 마치 베틀에 씨줄과 날줄을 엮어 무명옷을 짜는 것과 같다고 하여, 항렬 위(緯)자로 하고 천·지·세 글자를 합하여 장남을 위천(緯天), 차남을 위지(緯地), 막내인 풍암은 위세(緯世)라 지었다.

풍암은 아홉에 외숙부 귤정 윤구에게 배웠고, 11세에는 해남 출신 미암 유희춘에게 수학했다. 귤정은 퇴계와 학문을 교유하는 사이였는데 퇴계가 "호남에 인물이 있는가?"하고 물으니, "이 아이는 어리나 매우 덕성이 있는 듯합니다."라고 풍암을 추천했다. 풍암은 도산서원에 유학, 퇴계의 으뜸제자가 되었다. 25세에 퇴계를 모시고 명옥대(鳴玉臺)를 유람하였는데 그때 퇴계는 대(臺)의 기문(記文)을 짓고, 선생에게 글씨를 쓰게 하였다. 퇴계는 여러 제자들 앞에서 "공부하는 여가에 훌륭한 멋을 터득한 사람은 오직 문위세 뿐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제갈공명의 팔진도(八陣圖)에 대해 언급하고 그 해설서를 풍암에게 베끼어 연구토록 하였는데, 이는 훗날 임란 때 풍암이 의병장으로 나서 전략, 전술에 있어 남다른 활약을 했던 바탕이 되었다.

풍암은 도학에 집중하였는데 32세 때에 어머니의 권유로 향시에서 장원을 하고 사마시에 급제했다. 39세 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출세 길에 나아가지 않고 풍산(楓山)에 서실을 지어 제자 수십 명과 함께 자연에 은거하며 학문을 토론으로 소일했다. 51세에 유치면 늑용리로 이사했다. 냇가에 집을 짓고 주위에 매화와 대나무를 심었다. 지금은 수몰되어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가지산중에 백운암(白雲庵)이라는 암자를 짓고는 아들과 조카에게 활쏘기와 말달리기 등 육례(六禮)와 병서를 가르쳤다.

1592년 임진왜란. 개전 20여일 만에 왜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함경도와 전라도를 남기고 국토를 유린했다.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하자 선생은 사흘간 곡기를 끊은 채 통곡했다. 그는 거듭되는 패전 속에서 의병으로 분연히 일어섰다. 두 형과 함께 부춘정에서 거병의 뜻을 모으고 지금 장흥지법 자리, 장흥도부 객관인 관산관에서 강진, 영암, 보성, 장흥 여러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결의했다. 풍암은 원개, 영개, 형개, 홍개, 여개 등 다섯 아들, 희개, 희순 등 조카 둘, 그리고 종손 익명, 익화, 사위 백수민 까지 모두 10여명의 가족과 함께 거병했다. 풍암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또 노복과 이웃 고을 군인 이백여명을 이끌고 보성으로 가서 매형인 죽천 박광전과 현감 임계영 군대와 합세하였다. 의병은 임계영을 전라좌의병장으로 문위세를 백의의병장으로 김익복을 호표장으로 조직을 정비했다. 풍암은 보성과 순천, 남원, 무주, 금산, 성주 등지의 전투에서 군무를 계획, 처리하는 지략이 뛰어나 제갈량에 비유됐고, 늘 흰옷을 입어 '백의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호남의병의 양향관(군량미 동원 관리하는 직책)과 운량사를 겸임하고 전라좌도 연해 지역의 여러 고을에서 모은 군량을 영남지역 경상우도로 보내는 등 책무를 다했다. 당시 전란에 농사는 피폐한데 흉년이 겹쳐 백성과 군사들은 식량과 군량미가 절대 부족하여 초근목피와 나물죽으로 연명했다. 적병들도 군량미가 없어 근근이 연명하는 실정이었으니 피아에 아사자가 많았고 돌림병이 창궐하니, 처참한 형편이었다. 1394년 조정에서 여러 의병들을 김덕령(金德齡)장군에게 소속시킨 이후에 풍암은 향리로 내려와 백운암에 거처하며 성리학에 힘썼다.

62세 봄에 용담(龍潭)현령에 제수되었다. 관내 잔존 왜적들을 모두 쫓아내고,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적병 십만이 양치(良峙)를 넘어 진격해오자 아들, 사위, 조카들과 함께 적들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병을 이유로 용담현령 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을 사람들은 풍암의 송덕비를 세워 흠모했다. 1600년 선조로부터 3품관인 파주목사 직첩이 내렸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해 3월13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강성서원은 삼우당 문익점(文益漸, 1329~1398)과 풍암 문위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본시 임란 때 창의한 풍암을 추모하기 위해 1644년에 사당 월천사(月川祠)를 건립했는데, 1734년 영조 때 문익점을 주벽으로 하고 후손 문위세를 배향했다. 풍암은 충선공(강성군) 문익점의 9세손이다. 1785년 정조는 유생 600여명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삼우당의 출생지인 강성(지금의 경남 산청)의 이름을 빌려 '강성서원'이라 사액했다. 사액서원은 왕으로부터 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다. 정조는 풍암에게 병조참판의 증직을 내리고 불천지위로 사당에 영구히 제사를 모시도록 부조묘를 허락했다. 장흥댐 건설로 현재 위치(유치면 조양리)로 이건했다. 임란 당시 의병활동 내용을 담은 '풍암공 문위세 신도비'와 임금을 사모하였던 '사군대(思君臺) 유허비' '호남창의일기' 등의 기록이 있다. 신도비는 2품 이상 관리들에게 세울 수 있도록 국가에서 허락해 주는 것이다.

훼철과 복원, 이건 등 온갖 풍상을 겪었는데도 강성서원은 여전히 깊고 고고한 옛 풍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일문(一門)이 참전하여 의병 창의 깃발을 올린 풍암 문위세 6부자(父子)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서원 마당에 내려앉은 늦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빛나고 있다.

한 송이 무명 꽃에서 피어난 의류산업혁명

삼우당 문익점(文益漸, 1331~1400)은 혁명가도 아니고 이름난 문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어느 혁명가나 문인보다도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목화를 재배·보급해 이 땅에 의류혁명과 산업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1363년 원나라에 사신의 일행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한그루만 겨우 살렸다. 두 사람은 3년의 노력 끝에 대량 재배에 성공하였으나 실을 뽑는 난관에 부딪쳤다. 다행히 원나라 출신 승려 홍원(弘願)의 도움을 받아 목화를 재배해 옷을 만드는 기술을 확보했다. 문익점이 목화를 보급했고 정천익의 노력으로 널리 퍼졌다. 재배에 성공한지 10여 년 만에 온 나라에 퍼졌고, 의생활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목화가 국내에서 재배됨에 따라 그때까지 수입에 의존했던 목면과 솜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귀족들만 입던 무명옷과 솜옷을 서민들까지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고려 사람들은 양잠을 해 얻은 명주와 모시로 만든 저포, 삼을 길러 만든 삼베, 그리고 가죽옷 등을 입었다. 그러나 명주는 만들기가 힘들고, 모시와 삼베는 겨울에 입을 수가 없었으니, 무명의 보급은 백성들의 의생활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풍요도 함께 가져다 주었다. 또한 목화씨를 추출하여 솜을 트고, 물레와 가락 같은 면직 기구를 제작하고 발달시킴에 따라 생산 도구들도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의류혁명과 산업혁명을 가져 온 것이다.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재배한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 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남아 있으며,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강성서원 강당2(사진 백옥연)

강성서원 강당2(사진 백옥연)

강성서원 외삼문 숙연문과 풍암공 신도비(사진 백옥연)

강성서원 편액

강성서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필자와 문중 문영균 총무이사(사진 백옥연)

사당에 오르는 내삼문 존현문(사진 백옥연)

외삼문(숙연문)으로 보이는 풍암공신도비

장흥댐.장흥댐 건설로 강성서원은 유치면 늑용리에서 조양리로 이건 복원했다.(사진 백옥연)

충선공 문익점과 풍암 문위세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숭덕사 (사진 백옥연)

풍암 문위세 선생 유허비(사진 백옥연)

풍암 문위세 제각. 강성서원 왼편에 있다. (사진 백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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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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