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 광주 등임사(登臨祠)
서른 셋에 능소화처럼 져버린 호걸 중의 호걸 금호 임형수||아들에게 "글 읽지 마라" 유언
입력 : 2019. 09. 26(목) 13:05

1.등임사 강당_저존재著存_ 백옥연

1547년 9월21일, 조용하던 나주 송현동 마을 어느 집에 갑자기 금부도사가 들이닥친다. 그 집은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호걸 임형수의 집. 마치 손님을 맞이하듯, 그는 놀라는 기색도 없다. 사약을 들고 자신을 죽이러 온 금부도사를 누가 이처럼 태연자약하게 맞이했던가. 임형수는 안뜰에 들어가 부모님에게 두 번 절을 하고 나왔다. 채 열 살이 안 된 아들을 불러 그 와중에 경계를 하였다.

"구야, 울지 말고 아비의 얼굴을 잘 보아라. 이 아비는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너는 앞으로 과거에 응시하지 말거라"라고 일렀다. 아들이 절하고 돌아서서 엉엉 소리를 내어 울면서 몇 걸음 걸어가자, "나 좀 보아라" 하며 아들을 다시 돌려 세웠다. "글을 아니 읽으면 무식한 사람이 될 터이니 글은 배우되 과거는 보지 마라, 아니 과거를 아예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무과일 경우에 응시할 만하면 하고 문과는 절대 응시하지 말라"라고 일렀다. 죽음을 앞둔 애비가 어린 자식을 앞에 두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애절하게 전해온다. 임형수는 아들이 들어간 뒤에 "서산낙일에 명재경각이란 것이 나를 두고 한 말이구나"하고 탄식했다. 그는 동요하는 표정 없이 사약을 들고 마시려고 하다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 때 종이 안주를 올리니 "상여꾼들의 벌주도 안주를 안주는 것인데 이것이 어떤 술이냐, 독주가 아니더냐."하고 의연히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유분록(幽憤錄)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들의 전기)' 에는 '금호가 사약을 열여섯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까딱도 하지 않았다. 다시 두 사발을 더 마시게 했는데도 죽지 않자, 목을 졸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위 장면은 금호 임형수(1514 ~1547)의 이야기다. 자는 사수, 호는 금호, 본관은 평택이다. 나주 송현동에서 북병사 준의 아들로 태어났다. 1531년(중종 26) 18세에 진사시 합격하고 22세 젊은 나이로 대과에 급제하였다. 풍채가 좋고 기상이 호방하며 문장과 말타기 활쏘기에 뛰어났다. 문무를 겸비한 선비로 장차 재상감이라 하였다. 사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시강원 설서로 뽑혔다. 다시 홍문관 수찬을 지낸 후 사가독서당에 들어가 김인후, 이황, 나세찬 등과 인연을 맺으며 학문을 쌓았다. 중종의 신임을 받아 회령판관, 정3품 부제학까지 올랐지만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실권자였던 윤원형에게 미움을 받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을사사화'로 파직되었다. 2년 뒤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대윤 윤임의 일파로 몰려 사사되었다. 그의 이력만 보면 여느 평범한 선비로 보이지만 의외로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미남자였으며 장난스럽고 유머러스한 일화를 많이 남긴 독특한 인물이기도 하다.

1539년(종종 34) 봄, 대제학 양곡 소세양이 원접사가 되어 명나라 황태자 책봉을 알리는 사신을 맞이하였다. 저녁 태평관에서 열린 연회에서 26살 신예문사가 "상제의 어짊은 가없어 사해가 일가더라, 물이 동해로 흘러, 왕업의 기틀이 비롯하였네." 라며 장편 서사를 물 흐르듯 읊었다. 중국 사신은 신예문사를 동국가인으로 칭송하고 중국 관광을 보러 사절로 오라 초대를 하였고, 또한 금호의 고향을 찾겠노라 하였다. "언제 뗏목 타고 금호에 가리라." "전라도 길에 꽃샘바람 차게 불면, 영산포구는 소용돌이 여울물에 크게 놀랄거야" 라고 고향의 풍광과 물산을 자랑하며 문장으로 명나라 사신을 탄복시킨 신예문사는 바로 소세양의 종사관인 임형수였다. 금호는 임형수의 호이며 영산강을 말한다.

그 해 7월 회령판관으로 임명되었다. 회령은 두만강 변으로 여진과 접하고 있는 변방이다. 북방에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하고 일부 수령의 횡포로 백성들의 어려움이 많아 문신 중 무(武)를 갖춘 금호를 임명한 것이다. 그를 아끼던 소세양을 비롯 많은 이들이 보내지 말 것을 간언했으나 중종은 "이 사람은 문무가 뛰어나니 내가 변방에 보내는 것이다."라며 한결같은 신임을 보였다. 금호는 회령에서 때로 며칠분의 식사를 한꺼번에 하기도 하고 또 며칠씩 굶기도 하면서 "무장된 자 누구나 평소부터 이러한 습성을 길러야 한다."가르쳤다. 그리고 모든 폐단을 뿌리 뽑고 백성을 가족처럼 돌보니 심지어 오랑캐 무리까지 그의 높은 덕에 감화되어 귀화해 왔고, 혹은 대야(큰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그의 호방함과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회령에서 돌아와 이조좌랑, 홍문관 교리, 이조전랑, 사간원 사간, 홍문관 응교 등을 두루 지냈다.

임형수는 젊은 시절의 퇴계 이황과 친분이 두터웠다. 조용한 선비 스타일 이황에 비해 대범하고 호쾌한 성격의 금호. "산에 눈이 하얗게 쌓일 때, 검은 돈피 갖옷을 입고 흰 깃이 달린 기다란 화살을 허리에 차고, 팔뚝에는 백 근짜리 센 활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들어서며, 긴 바람이 일어나 초목이 진동하는데, 느닷없이 큰 멧돼지가 놀라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활을 힘껏 잡아 당겨 쏘아 죽이고, 말에서 내려 칼을 빼서 이놈을 잡고, 고목을 베어 불을 놓고 기다란 꼬챙이에다 그 고기를 꿰어서 구우면, 기름과 피가 지글 지글 끓으면서 뚝뚝 떨어지는데, 걸상에 걸터앉아 저며 먹으며, 곧은 대접에 술을 가득 부어 마시고, 얼큰히 취할 때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어 비단처럼 펄펄 내려 취한 얼굴 위를 스친다네. 이것이 장쾌한 일이네" 어느 날 임형수는 이황에게 사냥의 일화를 들려주며, 남자의 멋지고 장한 일이 이와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임형수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이황은 "실로 기이한 남아가 죽을 죄가 아닌데 정말로 원통하다. 아! 어쩌면 금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하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호방한 그를 그리워했다고 전한다. 이황은 임형수 보다 열세살 연상이고, 한 해 먼저 문과에 급제했다. 하지만 같은 독서당에서 글을 읽는 동료였으니, 겸허한 인품의 이황이 그를 벗으로 대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금호는 간혹 호기를 부리면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선배에게 거친 말을 하기도 했는데, 이황만은 존경하며 함부로 하지 않았다 한다.

또한 하서 김인후는 국가의 큰 인물이 원통하게 처형된 것을 슬퍼하며 '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져근덧 두던들 동량재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남기 바티리.' 라는 시로 임형수를 애도하였다.

야담집 『기문총화』에는 주인의 원수를 갚은 말 이야기가 있다. 양재역 벽서사건의 주동자이며 임형수를 모함하여 사사에 이르게 한 정언각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일이다. 말을 타다가 떨어졌는데 한 쪽 다리가 등자에 걸리자 말이 마구 날뛰면서 걷어차서 크게 다친 뒤 얼마 못가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이 그 말을 의마(義馬)라 부르며 통쾌해 하고 정언각의 불의를 하늘이 아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 말은 바로 임형수가 항상 타고 다니던 말이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말에서 떨어지다 한 쪽 다리가 등자에 걸려 걷어차여 사망했다'는 사실은 실록에도 나온다.

금호 임형수, 그의 시대는 사화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권력을 탐하고 부정부패한 오리(汚吏)가 득세하던 혹한의 시대였다. 이른 나이에 화려한 벼슬을 하니 시기하는 이들에겐 눈엣가시였고, 뜻을 나눈 이들에게는 문무로 큰 존경을 받았다. 냉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곧은 선비정신으로 정면승부를 펼치고 33세에 떠나버린 금호, 꽃으로 치면 꽃모가지 채 뚝 떨어지는 능소화 같은 사람이다.

광산구 등임동 내동마을에 있는 '등임사(登臨祠)'. 금호 임형수, 송파 임직, 관해 임회를 배향하고 있는 평택 임씨들의 사우이다. 여기저기에 가을꽃들이 아름답다. 여름으로부터 길게 이어온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다 졌으니 이제 가을이다. 가을은 추분에 둘로 나뉜다. 앞에는 얕은 개울 같은 선선한 가을이고, 뒤는 소리도 없이 흐르는 강처럼 깊은 가을이다. 들에 곡식이 익는 이런 가을에 늙은 서원처럼 묵향 가득한 곳에 다녀오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깊어가는 가을을 따라 사람도 깊어가는 시간들. 등임사 내려가는 길에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저 가을하늘을 향해 호방한 웃음을 날렸다. 사약을 들어 마시기 직전에 사약사발을 건넨 사람을 쳐다보면서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라고 되묻는 사람, 그런 사람을 떠올리면서 어찌 큰 웃음 한방 날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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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환정

삼공(三公)을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

불환정은 숙종 때의 처사였던 임덕원이 1771년(영조 47)에 건립 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환(不換)이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이 강산을 삼정승과도 바꿀 수 없다는 삼공불환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 이라는 고시에서 비롯하였다. 정자의 주인 임덕원(1713~1787)은 을미사화 때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양재 벽서사건'으로 화를 입은 금호 임형수와, 광주목사를 지내던 중 이괄의 군사에게 살해당한 관해 임회의 후손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헌 신짝으로 저버리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자연에 묻혀 지낸 강호의 현자이다. 선비 집안의 가풍을 이어 받아 대쪽처럼 올곧은 성품을 소유했던 임덕원은 벼슬을 하찮게 여겨 두어 칸 띠집을 짓고 오로지 학문연구와 자연 감상에 몰두하여 은거한 관계로 주위에서 사람들이 이 집을 가리켜 용이 엎드려 있다는 뜻으로 띠집의 이름을 복용암(伏龍菴)이라 했다. 건물은 정면, 측면, 각 3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에 방이 있다. 이곳에는 금호 임형수의 유고집을 펴내기 위해 새긴 목판이 보관되었으나 도난을 우려해 다른 곳으로 옮겨져 현재는 없다. 정내에 기우만의 <불환정중수기>를 비롯하여 임덕원, 기언정, 임창희 등 원운이 걸려있다.

등임사에서 우회전하여 마을을 지나 1.5km 정도 들어가니 깊은 숲속에 과연 삼공을 다 준다해도 바꾸고 싶지 않을 정자가 나타난다. 연못에 물이 흐르고, 사방을 둘러보니 속세의 소리 들리지 않고 책장을 넘기며 자연인 듯 바람인 듯 글자 읽기에 더 이상 좋은 곳이 없을 듯 하다. 주소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내등길(등임동) 204번지. 그러나 지도나 네비게이션으로 찾아가기가 어렵다. 마을에서 미리 물어보고 올라가는 것이 좋다.

1-1.등임사 강당 저존재 _사진 백옥연

2.사당 등임사_금호 임형수, 송파 임직, 관해 임회를 배향하고 있는 평택 임씨들 사우이다 사진 백옥연

2-1. 사당 등임사 사진 백옥연

2-2.사당 등임사_사진 백옥연

2-3.사당 등임사_사진 백옥연

2-4.등임사 내삼문_사진 백옥연

3.금호 임형수 선생 신위_사진 백옥연

4.등임사 내삼문 시간이 깊어지는 저녁 시간_사진 백옥연

5.등임사 담장위에 핀 능소화_어디든 타고 올라가 하늘을 향해 피고, 초라함을 보이기 전 동백꽃처럼 꽃모가지채 툭 떨어지는 능소화의 단호함은 선비의 기개를 닮았다. 능소화의 고고한 자태와 그윽한 향기는 특히 양반들이 좋아하여 곁에 두고 즐겼으니 '양반꽃'이라 불렸다.

5-1.등임사 능소화

6.불환정

6.불환정_처사 임덕원이 건립한 정자.정자의 이름은'아름다운 이 강산을 삼공과도 바꿀 수 없다'며 삼공불환차강산에서 가져왔다

7.등임사 묘정비_사진 백옥연

8.묵향 가득한 등임사를 나오는길, 잠시 멈춰서서 저 가을 하늘을 향해 호방한 웃음을 날린다. 사진 백옥연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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