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우주의 원리 만다라 도상 빌어 한글의 원리 표현
416. 문자추상과 한글만다라
입력 : 2024. 10. 10(목) 18:53
우실하, 한글 만다라 2020-ㅋ7 종이에 색·우유, 0.2×208.7cm, 2020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416. 문자추상과 한글만다라
“무명의 검객이 칼 대신 큰 붓을 들어 글자를 써 내려간다. 글씨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기도 하고 거대한 파도처럼 급습해오기도 하며 사막을 내닫는 말처럼 쏜살같기도 하다. 글자를 쓰는 듯한데 글씨가 아니요, 붓을 휘두르고 있어도 붓이 아니다. 때때로 모래판을 그어 내리는 지팡이가 되었다가 적의 목을 베는 예리한 칼이 되었다가 철학의 기운을 뿜어내는 장필(長筆)이 되기도 한다. 알지 못할 차원의 춤과 검객의 도술을 거쳐 마침내 진시황의 용좌에 검(劍)이라는 글자가 걸린다. 장이머우의 영화 ‘영웅-천하의 시작(2002)’ 얘기다. 내용이야 진시황 암살 기도를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시종 화려한 칼춤이 일이관지한 영화다.” 2023년 10월 13일 본 지면을 통해 묘사해두었던 장면이다. 한글날을 보내며 이 장면을 다시 떠올린 것은 한글 그림에 대한 생각이 여전히 머릿속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전히’라고? 그렇다. 사실 오랫동안 민화의 문자도를 공부하며 품어왔던 문제의식이 문자 그림들과 연관되어 수시로 내 머릿속을 어지럽혀온 것이다.
고암 이응노의 문자 추상과 군상(群像)
한국 문자 추상의 길을 개척했다고 알려진 고암 이응노는 신세계 미술관 개인전(1976년 5월) 도록에 수록된 작가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윤범모, ‘고암 이응노, 묵죽화에서 통일무까지’(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얼과 알, 2000)에서 인용) “이미 동양화의 한문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서예적 추상은 그 자원(문자의 근원)이 자연 사물의 형(태)을 빌린 것과, 음과 뜻을 형태로 표현한 것이니 한자 자체가 바로 동양화의 추상화적 바탕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형태의 아름다움이 무형의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때 ‘무형이 유형’이라는 동양의 철학적인 언어가 발생되며, 그것이 바로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그림의 구상이다.” 윤범모에 의하면 이응노는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1969년 프랑스 파리로 돌아간 후 사의적 추상과 서예적 추상의 세계로 몰입하게 된다. 즉 사의적 추상은 파피에콜레 계열의 작품이고 서예적 추상은 한자와 한글을 재구성한 추상작품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그의 문자 추상은 ‘심상의 문자 추상’으로도 불리며 거의 그림에 가깝게 표현되는데, 1980년 광주항쟁 후의 고백 속에서 이 변화를 잘 읽어낼 수 있다. “나는 특히 한국의 민족적인 추상화를 개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동양화에서 선, 한자나 한글에서의 선, 삶과 움직임에서 출발하여 공간구성과의 조화로 나의 화풍을 발전시켰지요.”(<중앙일보>, 1972년 12월 5일). 실제로 그의 <군상(群像)> 시리즈를 보고 있노라면, 낱개의 개인들이 뿜어내는 춤 혹은 몸짓의 이끌림에 한없이 끌려가는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한 화면에 수 천 명의 사람들과 몸짓 아니 어쩌면 그 포효들을 새겨두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출발이 문자 추상이었다. 유재길은 ‘고암 이응노의 문자 추상(1960~1980) 작품세계’라는 글에서 초기(1960~1965)의 콜라주 문자 추상, 초기와 중기(1960~1970)의 서예적 문자 추상, 후기(1970~1980)의 구성적 문자 추상으로 나누기도 한다. 지면이 짧아 이응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고를 달리하여 다루겠지만, 문자 추상에서 군상 시리즈로 나아간 그의 행보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한국적인 붓놀림이었다는 점만은 지적해두고 싶다.
우실하의 한글 만다라
이 지점에서 또 한 사람 주목할 이가 우실하이다. 2021년 ‘한글 만다라와 신년화’라는 주제로 초대전을 열기도 했다. 초대의 말에서 그는 50여 년간 준비한 ‘우실하류의 문인화 산조’를 돌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의 그림이 문인화이자 국악으로 치면 산조(散調)라는 뜻이다. 그는 화가가 아니라 학자다.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이나 <전통문화의 구성 원리(1998)>, <전통음악의 구조와 원리>(2004) 등 수많은 단행본은 물론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셀럽 연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한글 만다라는 어떤 그림일까? 도록에 쓴 김태은의 ‘한글, 우주를 품다’ 한 구절이 이를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왜 꼭 조형 작업이어야 하는가. 작가는 왜 그 오랜 연구를 하나의 총체적 이미지로서의 작품으로 전환했는가. 내부에서 끊임없이 추동하는 어느 욕구가 학자를 작가로 내몰았던 걸까. 어느 때보다도 한글이 ‘힙’한 지금,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한글의 제자원리를 설명하고 잇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화면 가득 고스란히 품고 조용하게 드러낸다. 지금까지 연구해왔던 내용-명리학의 내용, 음양오행의 원리, 역사적인 문양과 도상, 중국 문명과 한국 문명의 발자취, 한글의 원리-을 제한된 형식 안에 총체적으로 이끌어오는 데 성공한 이번 작품들은 그래서 중심과 무한한 변용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만다라와 닿아있다.” 실제 그의 한글 그림 거의 전부가 만다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한글 만다라 그림을 이렇게 설명한다. “한글의 ‘제자원리’를 바탕으로 5방위에 모음과 자음을 배당하고 5방색을 이용하여 그린 것이다. 만다라가 우주적 원리를 도상화한 것이라면 한글 만다라는 한글의 제자 원리 안에도 우주적 원리가 내재되어 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한글 만다라 시리즈는, 마치 우주의 만다라가 원심력과 구심력에 의해 수렴되고 확장되듯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들이 일정한 원리에 의해 확장되고 수렴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겠지만 그 중심에는 한글이 있고 한국이 있으며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한반도와 K-컬쳐의 중심 한국문화가 있다.
남도인문학팁
한글 그림의 무한한 세계
한글의 창제원리를 흔히 음양(모음 원리)과 오행(자음 원리)에서 찾는다. 한글이 역(易)의 원리 곧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다는 주장과 상관된다는 점에서 붓글씨와 친연성이 높다. 붓글씨 자체를 기(氣)의 운용이라고 말하는 바를 상고해보면 한자보다 한글이 이 원리를 재현하거나 재구성하는 데 유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형문자로서의 한자가 그림에 가까우니 현상적인 붓놀림에 더 가깝거나 유리해 보인다. 이에 반해 세종대왕이 처음 창제한 발음기호로서의 정음(正音) 및 훈민정음은 현상적인 붓놀림보다 기호와 도상화 측면이 우세하다. 한글과 한자가 지닌 각각의 장점이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동국진체(東國眞體)와 소전체(素筌體)를 견주어 영화 <영웅> 이야기를 썼던 것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화려한 칼춤, 모래밭을 달려나가는 발디딤, 음과 양으로 대칭을 이루는 칼싸움과 붓글씨를 주목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이응노의 문자 추상과 군상 시리즈에 견주어 우실하의 한글 만다라를 생각해본 것은 한글 그림의 무한한 세계를 점쳐보기 위해서다. 이응노는 한자를 포함한 한글의 춤 곧 문자의 몸짓을 문자 추상에서 군상 시리즈까지 다루었고, 우실하는 우주의 원리 만다라의 도상을 빌어 한글의 우주적 원리를 표현하였다. 각기 다른 기운생동이지만 한글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문제의식은 다르지 않다. 나는 민화의 문자도 공부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왔지만, 장차 한글의 살아 춤추는 몸짓을 예(藝)로 실천할 꿈을 꾸고 있다. 어쩌면 불립문자로서의 위상까지 나아갈 때 그 꿈에 다가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민화 문자도(文字圖)를 그리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얘기다.
우실하, 한글 만다라 2020-ㅋ5 종이에 채색·우유, 87.6×206.4cm, 2020 |
이응노, 추상, 1976, 천에 채색, 192×155 |
“무명의 검객이 칼 대신 큰 붓을 들어 글자를 써 내려간다. 글씨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기도 하고 거대한 파도처럼 급습해오기도 하며 사막을 내닫는 말처럼 쏜살같기도 하다. 글자를 쓰는 듯한데 글씨가 아니요, 붓을 휘두르고 있어도 붓이 아니다. 때때로 모래판을 그어 내리는 지팡이가 되었다가 적의 목을 베는 예리한 칼이 되었다가 철학의 기운을 뿜어내는 장필(長筆)이 되기도 한다. 알지 못할 차원의 춤과 검객의 도술을 거쳐 마침내 진시황의 용좌에 검(劍)이라는 글자가 걸린다. 장이머우의 영화 ‘영웅-천하의 시작(2002)’ 얘기다. 내용이야 진시황 암살 기도를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시종 화려한 칼춤이 일이관지한 영화다.” 2023년 10월 13일 본 지면을 통해 묘사해두었던 장면이다. 한글날을 보내며 이 장면을 다시 떠올린 것은 한글 그림에 대한 생각이 여전히 머릿속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전히’라고? 그렇다. 사실 오랫동안 민화의 문자도를 공부하며 품어왔던 문제의식이 문자 그림들과 연관되어 수시로 내 머릿속을 어지럽혀온 것이다.
고암 이응노의 문자 추상과 군상(群像)
한국 문자 추상의 길을 개척했다고 알려진 고암 이응노는 신세계 미술관 개인전(1976년 5월) 도록에 수록된 작가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윤범모, ‘고암 이응노, 묵죽화에서 통일무까지’(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얼과 알, 2000)에서 인용) “이미 동양화의 한문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서예적 추상은 그 자원(문자의 근원)이 자연 사물의 형(태)을 빌린 것과, 음과 뜻을 형태로 표현한 것이니 한자 자체가 바로 동양화의 추상화적 바탕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형태의 아름다움이 무형의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때 ‘무형이 유형’이라는 동양의 철학적인 언어가 발생되며, 그것이 바로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그림의 구상이다.” 윤범모에 의하면 이응노는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1969년 프랑스 파리로 돌아간 후 사의적 추상과 서예적 추상의 세계로 몰입하게 된다. 즉 사의적 추상은 파피에콜레 계열의 작품이고 서예적 추상은 한자와 한글을 재구성한 추상작품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그의 문자 추상은 ‘심상의 문자 추상’으로도 불리며 거의 그림에 가깝게 표현되는데, 1980년 광주항쟁 후의 고백 속에서 이 변화를 잘 읽어낼 수 있다. “나는 특히 한국의 민족적인 추상화를 개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동양화에서 선, 한자나 한글에서의 선, 삶과 움직임에서 출발하여 공간구성과의 조화로 나의 화풍을 발전시켰지요.”(<중앙일보>, 1972년 12월 5일). 실제로 그의 <군상(群像)> 시리즈를 보고 있노라면, 낱개의 개인들이 뿜어내는 춤 혹은 몸짓의 이끌림에 한없이 끌려가는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한 화면에 수 천 명의 사람들과 몸짓 아니 어쩌면 그 포효들을 새겨두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출발이 문자 추상이었다. 유재길은 ‘고암 이응노의 문자 추상(1960~1980) 작품세계’라는 글에서 초기(1960~1965)의 콜라주 문자 추상, 초기와 중기(1960~1970)의 서예적 문자 추상, 후기(1970~1980)의 구성적 문자 추상으로 나누기도 한다. 지면이 짧아 이응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고를 달리하여 다루겠지만, 문자 추상에서 군상 시리즈로 나아간 그의 행보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한국적인 붓놀림이었다는 점만은 지적해두고 싶다.
우실하의 한글 만다라
이 지점에서 또 한 사람 주목할 이가 우실하이다. 2021년 ‘한글 만다라와 신년화’라는 주제로 초대전을 열기도 했다. 초대의 말에서 그는 50여 년간 준비한 ‘우실하류의 문인화 산조’를 돌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의 그림이 문인화이자 국악으로 치면 산조(散調)라는 뜻이다. 그는 화가가 아니라 학자다.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이나 <전통문화의 구성 원리(1998)>, <전통음악의 구조와 원리>(2004) 등 수많은 단행본은 물론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셀럽 연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한글 만다라는 어떤 그림일까? 도록에 쓴 김태은의 ‘한글, 우주를 품다’ 한 구절이 이를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왜 꼭 조형 작업이어야 하는가. 작가는 왜 그 오랜 연구를 하나의 총체적 이미지로서의 작품으로 전환했는가. 내부에서 끊임없이 추동하는 어느 욕구가 학자를 작가로 내몰았던 걸까. 어느 때보다도 한글이 ‘힙’한 지금,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한글의 제자원리를 설명하고 잇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화면 가득 고스란히 품고 조용하게 드러낸다. 지금까지 연구해왔던 내용-명리학의 내용, 음양오행의 원리, 역사적인 문양과 도상, 중국 문명과 한국 문명의 발자취, 한글의 원리-을 제한된 형식 안에 총체적으로 이끌어오는 데 성공한 이번 작품들은 그래서 중심과 무한한 변용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만다라와 닿아있다.” 실제 그의 한글 그림 거의 전부가 만다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한글 만다라 그림을 이렇게 설명한다. “한글의 ‘제자원리’를 바탕으로 5방위에 모음과 자음을 배당하고 5방색을 이용하여 그린 것이다. 만다라가 우주적 원리를 도상화한 것이라면 한글 만다라는 한글의 제자 원리 안에도 우주적 원리가 내재되어 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한글 만다라 시리즈는, 마치 우주의 만다라가 원심력과 구심력에 의해 수렴되고 확장되듯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들이 일정한 원리에 의해 확장되고 수렴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겠지만 그 중심에는 한글이 있고 한국이 있으며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한반도와 K-컬쳐의 중심 한국문화가 있다.
남도인문학팁
한글 그림의 무한한 세계
한글의 창제원리를 흔히 음양(모음 원리)과 오행(자음 원리)에서 찾는다. 한글이 역(易)의 원리 곧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다는 주장과 상관된다는 점에서 붓글씨와 친연성이 높다. 붓글씨 자체를 기(氣)의 운용이라고 말하는 바를 상고해보면 한자보다 한글이 이 원리를 재현하거나 재구성하는 데 유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형문자로서의 한자가 그림에 가까우니 현상적인 붓놀림에 더 가깝거나 유리해 보인다. 이에 반해 세종대왕이 처음 창제한 발음기호로서의 정음(正音) 및 훈민정음은 현상적인 붓놀림보다 기호와 도상화 측면이 우세하다. 한글과 한자가 지닌 각각의 장점이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동국진체(東國眞體)와 소전체(素筌體)를 견주어 영화 <영웅> 이야기를 썼던 것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화려한 칼춤, 모래밭을 달려나가는 발디딤, 음과 양으로 대칭을 이루는 칼싸움과 붓글씨를 주목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이응노의 문자 추상과 군상 시리즈에 견주어 우실하의 한글 만다라를 생각해본 것은 한글 그림의 무한한 세계를 점쳐보기 위해서다. 이응노는 한자를 포함한 한글의 춤 곧 문자의 몸짓을 문자 추상에서 군상 시리즈까지 다루었고, 우실하는 우주의 원리 만다라의 도상을 빌어 한글의 우주적 원리를 표현하였다. 각기 다른 기운생동이지만 한글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문제의식은 다르지 않다. 나는 민화의 문자도 공부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왔지만, 장차 한글의 살아 춤추는 몸짓을 예(藝)로 실천할 꿈을 꾸고 있다. 어쩌면 불립문자로서의 위상까지 나아갈 때 그 꿈에 다가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민화 문자도(文字圖)를 그리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