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고흥 마동마을의 자랑스러운 농악 유물
406. 머리카락 모아 만든 고흥 마동의 상모
입력 : 2024. 08. 01(목) 17:33
머리카락을 모아 만든 고흥 마동 매구의 상모 전립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고흥 마동 매구 장구통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고흥 마동 벅구
매년 농한기, 이장 집이나 마을 상쇠 어르신 집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농악 상모(象毛)의 전립(戰笠)을 만들기 위해서다. 상모는 농악놀이에서 상쇠나 작은북을 치는 놀이꾼들이 머리에 쓰고 종이를 길게 달아 이리저리 돌리는 벙거지를 말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 농악의 상모놀이가 포함되어 있다. 벙거지 자체는 전립이라 하고, 돌리는 줄 등을 포함하여 전체를 통칭 상모라 한다. 전립(戰笠)은 조선시대 무관이 쓰던 모자를 말하는 것이니, 농악이 군사 영역에서 비롯된 놀이임을 알 수 있겠다. 물론, 농악의 기원설에는 궁중 나례희(儺禮戱)나 두레 풍장 등 예 일곱 가지가 있다. 하나하나가 소중한 뿌리이므로 나중에 따로 소개한다.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마동 농악의 경우, 매우 특별한 사례가 있다. 전립을 만드는 데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년내 마을 여자들이 정성 들여 머리칼을 모은다. 빗질하면 생각보다 많은 머리카락이 나온다. 세가 좋은 이들은 며칠 만에 한 줌씩 모으기도 하고 성근 이들은 좀 덜 모으기도 한다. 모은 머리칼들은 마을 이장 집이나 상쇠 집에 전달한다. 이것을 돼지 털과 함께 아교와 짓이겨서 까만 색깔의 벙거지 즉 모자를 만든다. 이렇게 만든 상모가 현재 6개 보존되어 있다. 150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왜냐하면 마동 매구 별신제의 1대 상쇠를 박순돌(1849~1882로 추정)로 잡기 때문이다. 150년 전 고흥 여인네들의 머리칼이 상모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이에 앞서 마동 매구 마을은 여산송씨(礪山宋氏) 고흥 입향조인 송간(松侃, 1405~1480)이 심었다는 당산나무를 충간목(忠剛木)이라 부르며 신성시해왔다. 그래서인지 잡색이라 불리는 농악대의 대포수를 마동에서는 돌포수라고 부르며 돌포수관에는 후면에 호랑이 호(虎)자를 쓰고 전면에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라 쓴다. 오위장 벼슬을 했던 입향조 송간을 상징하는 의미로 이해된다. 살메망태라고도 부르는 대포수 가죽가방에 너구리, 토끼, 꿩 등의 짐승 가죽을 넣으며 장총을 든다. 하지만 마동 돌포수 망태에는 짐승 가죽 대신 박바가지와 짚신, 풍경을 달았다는 점이 특색이다. 총을 든 사냥꾼이나 호랑이 잡는 착호군(捉虎軍)의 의미가 아니라, 여산송씨 고흥 입향조인 서재 송간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통나무를 파고 깎아 만든 장구와 벅구



마동마을에서 상모만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니다. 해마다 아름드리 통나무를 구해서 장구와 벅구 또한 자체 제작했다. 현재 보존하고 있는 벅구 12개 중 3개는 통북이고 9개는 쪽북이다. 가죽이 마모되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모두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죽의 마모상태로 보거나 원로들의 구술을 통해서 추정해보면 통북은 대략 150년 전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쪽북도 1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매년 겨울철이면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이나 상쇠의 집에 모여 통나무를 깎고 뚫어서 통북을 만들었으며, 통나무를 구하지 못한 해에는 쪽북으로 잇대어 악기제작을 하였다. 벅구는 법고(法鼓)에서 온 말로 지역에 따라 버꾸, 반고, 반구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전국에 보편적인 악기였고 특히 서남해안 지역의 농악에 발달한 악기였으나 점차 소멸하였다. 현재는 ‘광양버꾸’, ‘고흥벅구’를 중심으로 남도지역 특히 서남해지역 일부 지역에 잔존해 있다. 사물놀이가 보편화되면서 농악기의 북이 대개 큰북으로 바뀌었지만, 마동 매구의 경우는 전래 습속을 잘 이어오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 윤석운의 한국무악고-장단과 농악 및 춤과 가면��(동학당, 1979)에 의하면, 법고(法鼓)는 절에서 승려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승려 공양이나 포교할 때에 사용하였던 것이 어느새 민간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북이나 소고(小鼓)는 이것의 대소 형태로 변형된 것이라 하였다. 특히 윤석운은 고흥에 ‘구녁놀이’라는 농악 놀이가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구녁놀이’는 놀이 자체의 이름이며 이 놀이의 주된 장단은 장구로 치지 않는다 하였고, 경기도 안성에서는 벅구(소고와 북의 중간으로 된 크기의 중북)놀음에서 하고, 고흥에서는 북으로 그 장단을 치고 있으며, 무용에서는 ‘구녁놀이’란 장단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위에서 말한 고흥의 북이 지금의 벅구다. 장구는 소실되고 현재 장구통 1점만 보존되어 있다. 무겁고 둔탁하며 일부 파손되었지만 보존의 가치가 크다 할 만큼 양호한 상태다. 벅구와 마찬가지로 마을에서 주민들 스스로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장구통 안쪽을 보면, 기존의 악기와는 다르게 소리 턱이 없다. 주지하듯이 국악 타악기의 기본 원칙이 세 가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 지면에 몇 차례 칼럼으로 다루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첫째는 공명통이 있을 것, 둘째는 소리 턱이 있을 것, 셋째는 좌우의 크기가 다를 것 등이다. 이 중에서 마동 장구통의 특징은 공명통과 좌우의 크기가 다른 점은 충족하는데 소리 턱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나아가 장구통 안쪽의 공명통에 소리 돌기의 나선이 없이, 거칠게 끌로 깎고 판 흔적들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좌우의 장구통을 이어서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통나무 하나를 파고 깎아서 만든 통장구라는 점이다. 이는 악기를 만드는 전문가가 아닌 마을농악대원 스스로 깎아서 만들었다는 의미가 되므로, 벅구 제작과 더불어 민속사회의 악기제작이라는 특성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외에도 벌교읍 유기그릇 공방(윤재덕에서 한상춘 보유자로 전승)과 네트워크하여 구입한 꽹과리 1점과 나발 소리통 등이 보존되어 있다.



남도인문학팁

마동매구 유물을 일괄하여 전남도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수 없을까?

머리카락을 모으고 스스로 벅구와 장구를 만들어서 농악에 임한 것만이 아니다. 마을 전승 문헌 중 교자계안(轎子禊案)에는 농악치는 법은 물론 농악 악기와 물품 등 물목기가 수록되어 있다. 별신제의절(別神祭義節) 마동 농악이 2022년 전라남도 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문서 자료이다. 신해(辛亥) 정월에 쓰였으므로, 1911년 혹은 1971년이다. 무형문화재 농악 지정신청서에 의하면 1911년 설을 반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서 내용에 별신제 즉 당산제 홀기 등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어서, 지금도 이 절차에 의해 당산제를 진행한다. 이같은 자료들이 8건이나 보존되어 있다는 점도 고무적이지만 이 모든 문서와 악기 등이 농악이라는 한 주제로 모일 수 있는 유물이라는 점을 주목하다. 그래서다. 마동매구 유물을 일괄하여 전라남도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수는 없을까? 개별적으로 보면 1800년도 중반에서 1900년도 중반에 이르는 백 년 남짓한 유물이고, 더구나 마을 사람들 스스로 머리칼을 모으고 통나무를 깎아 만들었기에 하찮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사찰이나 향교의 매우 오래된 문서나 유물만 문화재 취급하던 시절에 비하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형이나 무형을 넘어 설화와 풍속까지 문화유산으로 해석하고 보존하는 유산 정책이 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민중들의 피와 땀과 정성이 가득 깃들어 있는 유물들이 유산적 가치가 큰 것 아닌가 생각한다. 시대정신이라 게 무엇인가? 한 시대에 지배적인 지적, 정치적, 사회적 동향을 나타내는 정신적 경향 아닌가? 그런 점에서 마동 매구 유물들은 명실상부한 우리 시대 우리 지역의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개별적으로 흩어져 전승되는 유물보다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일괄하여 보존하고 전승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귀한 유산을 스스로 만들고 가꾸고 전승해오신 고흥 마동마을 사람들이 자랑스럽다.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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