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문화가 만든 5·18
김성수 논설위원
입력 : 2025. 05. 13(화) 13:22
혁명은 총칼로 시작되지만, 기억은 문학과 문화로 살아남는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낳은 수많은 기록 중, 가장 오래 남은 목소리는 법령도, 정치 문서도 아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다. 장발장과 가브로슈의 서사는 단순한 허구를 넘어, 억압받는 민중의 고통과 인간 존엄, 저항의 윤리를 상징하는 존재로 남았다. 위고는 파리 봉기와 혁명의 폐허 속에서 ‘기억의 윤리’를 문학으로 엮었다. 가브로슈가 쓰러진 길목은 그 어떤 전승기념물보다 강한 상징이 됐고, 프랑스 시민들은 문학 속 인물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레 미제라블이 프랑스혁명의 가치를 보존한 문학이라면, 한국의 5·18은 ‘소년이 온다’로 주목받고 있다.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이 소설은 도청에 남아 희생된 ‘소년 문재학’을 모티프로,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침묵, 윤리를 따라간다. 이 작품은 13개국에 번역돼 광주의 비극을 세계에 알렸고, 유럽과 아시아의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는 “한국의 광주가 세계의 광주가 됐다”고 평했다. 이는 단순한 감동을 넘어, 세계 시민들이 광주의 진실 앞에서 연대하는 문화적 순간이었다.

5·18은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넘어서, 전국화와 세계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진실을 알고, 그 진실을 지키는 방식은 이제 예술과 문학의 언어를 통해 더욱 확장되고 있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최초의 민중기록문학으로 생존자들의 구술을 담아냈고, 임철우의 ‘봄날’은 각기 다른 시선으로 5월을 다시 썼다. 이들은 단지 상처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곡에 맞선 사회적 증언이자 다음 세대를 향한 윤리의 문장이다.

최근에는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아시아권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번역하고, 해외 대학에서 ‘소년이 온다’를 교재로 읽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5·18은 더 이상 지역의 사건이 아니다. 광주의 5월은, 문학과 예술을 통해 세계적 기억으로 확장되고 있다.

2025년은 5·18민주화운동 45주년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날의 진실을 되새긴다. 그리고 바란다. 또 다른 5월이 미래의 누군가에게 진실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더 강한 언어와 예술이 필요하다고. 문화는 장르가 아니라, 연대를 이끄는 감정의 언어다. 우리는 5월의 진실을 오늘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말하는 것, 기억하는 것, 그리고 예술로 다시 쓰는 것. 그것이 곧 민주주의다. 김성수 논설위원
서석대 최신뉴스더보기

기사 목록

전남일보 PC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