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역사의 무게
윤준명 취재2부 기자
입력 : 2024. 12. 09(월) 21:26
윤준명 취재2부 기자.
대학시절 역사를 전공하면서 교수님께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역사를 활자로 접하게 되면 가벼이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사학도라면 역사를 배울 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고통, 기쁨과 슬픔에 공명하며 무게를 함께 짊어질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수많은 전쟁과 혁명의 기록들은 숫자로 요약되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던 이들의 외침과 절규는 쌍따옴표 안에 갇힌 짧은 문장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그 숫자와 문장 뒤에는 피와 땀, 그리고 이름 없는 수많은 삶이 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했던가.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이들, 정의와 자유를 외치다 생을 마감한 이들의 삶과 처절한 염원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주춧돌이 됐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은 ‘종북 반국가 세력 척결’,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 위기’ 등을 운운하며 45년 만의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날 밤, 서울에 북한 특수부대라도 파견이 됐던가. 계엄군이 국회를 둘러싸고, 서울 상공을 선회하는 군 헬기와 도심을 가로지르는 장갑차의 모습이 TV 화면을 가득 채웠다.

민주화 이후에 태어난 기자로서는 이 광경이 가져다준 충격과 두려움을 쉬이 떨칠 수 없었다. 대통령의 발언 후, 일상에서 당연히 누리던 자유와 안전이 한순간에 사라졌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45년 전으로 회귀한 듯했다. 살아보지도 못한 그 시절의 공포와 두려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날의 광주를 살던 이들은 또 오죽했을까. 취재 중 만난 한 어르신은 “계엄령이라는 단어를 다시 듣는 것만으로도 1980년 5월로 돌아간 것 같았다”며 울분을 토했다. 40년이 훌쩍 넘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이, 많은 광주시민에게는 결코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었다. 계엄령이라는 단어 하나로, 그들의 과거는 다시 현재의 공포와 아픔으로 소환됐다.

비통한 것은 이번 비상계엄이 국가적 위기가 아닌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함인 것이다. 윤 대통령은 권력유지를 위해 과거 군사 독재정권의 방식을 답습해 한국사회의 오랜 성취를 일거에 무너뜨리려 했다.

여당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역사적 사명 앞에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민주주의 퇴행을 방조하고, 역사의 무게를 거부했다.

역사는 단순히 기록으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잘못된 선택과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수많은 피와 희생으로 쌓아 올린 민주주의를 우리가 과연 지킬 준비가 돼 있는가.

과거의 아픔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민이 역사의 무게를 짊어지고 잘못된 선택과 행위에 단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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