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바보상자와 뇌 썩음
김성수 논설위원
입력 : 2024. 12. 03(화) 17:27
과거 초점 잃은 시선으로 멍하니 텔레비전(TV)만 쳐다보는 아이를 볼 때 부모의 속은 얼마나 타 들어갈까? 부모들은 TV를 보는 아이들에게 “TV 보면 바보 된다”고 늘 잔소리를 해댔다. TV 볼 시간에 책 한 권, 공부를 하라는 말은 레퍼토리처럼 반복했다.

그런데 요즘 생각하면 TV는 약과다. 더욱 고약한 놈(?)이 나타나서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TV를 보는 아이들이 사라졌다.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숏츠 등 60초 안팎의 짧은 영상을 일컫는 숏폼(short form) 콘텐츠가 쏟아지면서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고 사는 아이들이 천지다. TV는 전원을 끄고 리모컨을 숨기기라도 하지만 스마트폰은 제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TV는 그나마 가족끼리 옹기종기 모여 함께 시청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이라도 마련된다.

스마트폰 및 SNS 중독은 심각한 사회문제다. 오죽했으면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출판하는 옥스퍼드 랭귀지가 최근 올해의 단어로 ‘뇌 썩음(Brain rot)’을 선정했다. 매우 과격해 보이는 단어지만 부모들 입장에서 매우 수긍하는 분위기다.

‘뇌 썩음’은 주로 질 낮은 온라인 콘텐츠를 과도하게 소비해 정신적, 지적 상태가 악화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다. ‘뇌 썩음’은 인터넷 발명 이전인 1854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저서 ‘월든’에서 처음 등장했다. 소로는 복잡한 아이디어를 평가절하하는 사회적 풍조와 이로 인한 지적 능력 쇠퇴를 비판하기 위해 해당 단어를 사용했다. 이후 소셜 미디어 상에서 Z세대와 알파 세대들에게 유행했으나, 현재는 저품질 콘텐츠를 표현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 단어의 사용 빈도는 지난 1년간 약 230% 증가했다고 한다. 앤드루 프르지빌스키 옥스퍼드 대학교수는 “이 단어의 유행은 현재 우리가 처한 시대적 증상”이라며 “SNS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청소년들의 과도한 스마트폰과 SNS 사용을 막기 위해 호주 의회는 전 세계 최초로 16세 미만 청소년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16세 미만은 X·페이스북·인스타그램·스냅챗·틱톡 등과 같은 SNS 계정에 접속할 수 없다. 이를 어기는 SNS 플랫폼에는 최대 450억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이 같은 움직임은 미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요즘엔 스마트폰에 빠진 아이들에게 차라리 TV를 보라고 한다. ‘바보상자’로 억울한 누명을 쓴 TV가 ‘뇌 썩음’을 일으키는 스마트폰 중독을 대처할 놀라운 처방이 되고 있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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