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창·조재호>피디수첩, 그리고 교사란 사람 ‘들’이 하는 일
조재호 무등초 교사
입력 : 2024. 11. 10(일) 18:38
조재호 무등초 교사
11월 5일, MBC PD수첩 ‘아무도 그 학부모를 막을 수 없다’를 보고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학부모는 교장에게 민원을 넣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동사무소에 가면 주민등록증이나 등본을 발급해주잖아요. 그게 불편하면 다른 직업을 찾으면 되죠”라고. 교사 개인이 쓴 누가기록-일기장을 보여주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했습니다. 특정 소수가 학급, 학교, 교육청마저 무기력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물론 이런 악성 민원인은 아주 일부입니다. 대다수 학부모들은 교사를 적으로 삼고, 사사건건 고소, 고발을 하지 않지요. 아이들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가 변한 것도 사실입니다.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세대‘>’에는 2013년 무렵부터 ‘아동기의 대재편’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전 세대와 차별화되는 ‘불안’한 세대가 탄생했다는 겁니다. 혹시 비슷하게 학부모 세대도 달라진 것은 아닐까요?

학교는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서비스’기관이고, 권위주의적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감시하고 ‘민원’으로써, 학교에 참여하는 것이 민주적 학부모의 상이 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대세입니다. 그런데 저는 “학부모님들, 학교는 즉각 문서를 발급하는 서비스 기관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기 위해 시간과 영혼이 필요한 기관입니다!”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중학교 교사의 찰나 같은 교육경험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이글을 씁니다.

S교사는 경력 25년차. 수업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A란 도움반 학생이 수업중 화장실에 가겠다고 해서 보냈습니다.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걱정 되었던 교사가 창밖을 보니, A가 빼꼼히 교실을 들여다봅니다. 난처한 표정을 알아챈 B(반장)와 C(친구)가 바로 A를 살피더니 급히 교실을 나갑니다. 실은 A가 일을 본 화장실 변기가 막혀 있었고 물이 화장실 바닥으로 흘러 넘쳤습니다. B와 C는 사태를 처리하기 위해 급히 화장실로 갔고, 심각해진 상황을 본 후, 교실로 돌아와 마스크를 챙깁니다. 중2답지 않는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듬직하게 “남자화장실이니 우리가 처리할게요”라고 교사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리는 ‘우엑, 우엑’입니다. 반 아이들도 상황을 파악합니다.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지만 B와 C를 응원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잠시 후 남교사인 담임이 와서 상황을 정리합니다.

이것이 이날 벌어진 일의 전부입니다. 무슨 대단한 일이 아니죠? 흔한 일입니다. 그런데 S교사는 왜 그렇게 ‘감동’을 했을까요? 행복 호르몬이라는 도파민이 줄줄 분비된다는 표현까지 등장했어요.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교사는 A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고 합니다. 사람은 도움이 필요하면, 이를 청해야 합니다. 쉬운 일일까요? 아닙니다. 그 아이가 도움반 아이라서가 아니라, 평범한 모든 이들도 남에게 부탁하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수치스러운 상황(변기 막힘)에서 그냥 몰래 나오는 사람이 많지요. 그런데 A는 자신이 속한 집단을 신뢰했습니다. A가 자기 학급 아이들과 교사들을 믿었기기에 자연스럽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교사는 보았다는 것이죠. 한 아이가 자기 집단을 믿고 무엇인가를 부탁하게 되기까지 그 과정 속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험들이 축적되었는지, 그 시간과 경험의 무게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리더인 B와 C는 책임지는 든든한 모습을 보였고 다른 나머지 아이들도 A가 당황하지 않도록 집단적인 배려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치 자신들도 기꺼이 B와 C가 될 수 있을 듯 행동했습니다.

S교사는 왜 사건을 25년 공교육 현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하려고 했습니다. 너무 행복해서 잠을 설쳤다는 S교사의 말에 동료들은 농담인 줄 알고 웃었지만, 사정을 듣고는 모두 공감했다고 합니다. 거의 모든 교사가 각기 다른 이유로 이 찰나 같은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공교육 현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들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지요. 약자는 도움을 청하고, 리더는 책임감 있게 궂은일을 하고, 다수는 이를 지지합니다. A가 언젠가는 B, C처럼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를 도왔던 B와 C에게도 멋진 성장의 경험입니다. 이런 일은 한 두사람의 뛰어난 ‘교사’들의 지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수많은 ‘교사단’들과 함께 나눈 ‘경험’들의 결과입니다. 현재의 교사뿐 아니라, 과거, 이 아이들을 가르쳤던 모든 교사들이 일상 생활속에서 꾸준히 보여준 ‘노력’들 이 찰나 같은 교육적 순간이 만든것이죠. 그래서 S교사는 가슴 벅차도록 참 감동했다는 것이죠.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나도 과거, 현재, 미래로 연대된 ‘교사’집단에 대한 소속감에 풍요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번개 같은 순간이 민원 서비스로 제공될 수 있는 일일까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학교는 등본을 떼고 ‘민원’을 넣고 서비스를 받는 공간이 아닙니다. 학교는 미래세대를 더 멋진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오랜 기간, 교사란 ‘어른’ 집단이 그들의 영혼을 집단적으로 갈아 넣는 곳입니다. 아이들이 자기 집단을 신뢰하여 도움을 청하고, 리더는 책임지는 태도를 보이고, 구성원들은 이를 지지하는 힘을 가진 존재로 키워내는 것에는 오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교사를 싸워 이겨야 할 적군으로 여겨 정서적 아동학대로 고소하는 관행은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어둡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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