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차별과 통제를 되짚는 '만남'
[신간]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박화성, 박서련│작가정신│1만6000원
입력 : 2024. 10. 10(목) 18:17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 김명순이 데뷔한 지 한 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현대 여성 작가와의 백 년 시공을 뛰어넘은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의 또 다른 근원과 현재를 보여주고자 기획된 ‘소설, 잇다’의 여섯번째 작품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가 새로 출간됐다.

1903년 목포에서 태어나 1988년 85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한국 여성문학사상 가장 오랜 기간 활동하며 사회와 역사적 약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박화성 작가와 지난 2015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혜성같이 등장한 박서련 작가의 작품들이 이 책에 수록됐다.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 ‘홍수전후’, ‘호박’은 그가 생전 그려내고자 했던 노동자와 민중, 여성들이 억압받는 사회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이다.

수탈자인 일본인 관리와 공사 책임자들에게 피지배자인 하수도 공사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부조리한 현실과 이에 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룬 작품 ‘하수도 공사’는 탁월한 인물 활용으로 계급의식의 각성으로 인한 갈등과 모순도 함께 드러낸다.

‘홍수전후’에선 35년 만의 대홍수가 앗아간 한 가정의 소중한 딸과 재산으로 빈부격차와 비례하는 자연재해의 피해와 참상을 보여주며 개혁의 의지를 다잡는 농민들의 군상을 다룬다.

박서련 작가의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는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를 변주한 소설로도 읽힌다. 인문학 독서 동아리 ‘유독’의 회장이자 총여학생회 선거를 앞둔 진은 그의 여자친구 림과의 관계를 비밀에 부치려 한다. 독서 토론 시간 대상 작품이 된 ‘하수도 공사’에 대한 열띤 의견이 오가던 중 림이 내던진 말은 여성의 삶을 옭아매는 차별과 통제, 배제의 문제를 관통한다.

일제의 착취에 저항해 동맹 파업을 강행한 ‘민족적 대의’가 한 세기를 넘겨 레즈비언 공표에 따른 사회적 불이익 등 남성중심주의와 이성애주의로 가득한 현대로 이어지는 100년의 간극은 공명이 흐르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 선명히 찍힌 억압과 차별의 그림자다.
박찬 기자 chan.park@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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