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별세…향년 95세
1944년 교사 강압에 일본 떠나
손가락 절단·발목 등 부상 당해
고향서도 갖은 모욕·수난 겪어
"평생 가슴 못 펴 뒷길로 살아"
입력 : 2024. 10. 06(일) 16:27
지난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김성주 할머니가 취재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일제강점기 당시 10대의 어린 나이에 미쓰비시중공업으로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지난 5일 오후 김 할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6일 밝혔다.

순천이 고향인 김 할머니는 순천남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4년 5월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해서 중학교도 갈수 있다”는 일본인 담임 교사의 권유와 강압으로 친구들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그녀의 나이는 겨우 만 14세였다.

지난 1944년 6월경 나고야에 도착해 노동에 들어가기 전 순천에서 동원된 동료들과 김성주 할머니가 나고야성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할머니가 도착한 곳은 비행기를 만드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공장이었다. 굶주림 속에 임금 한 푼 받지 못하고 고된 노동을 강요받았다. 철판을 자르는 선반 일을 하던 중 왼쪽 검지 손가락이 잘리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당시 일본인 감독관은 잘린 손가락으로 주워 “오끼(大きい: 크다), 아이고 크다”하며 하늘로 던지면서 놀렸다고 한다.

1944년 12월 7일 발생한 도난카이(東南海) 지진 당시에는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의해 발목에 큰 부상을 입었다.

해방 후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유 하나로 결혼해서도 남편으로부터 온갖 인신모욕과 구박을 들어야 했다.

김 할머니는 생전 “내 평생 가슴 펴고 큰 길 한번 다녀 보지 못하고, 뒷질(뒷길)로만 살아왔다”고 말했다.

뒤늦게 용기를 내 양금덕 할머니 등과 함께 소송에 나섰지만, 2008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기각 패소했다.

지난 2013년 10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법정을 가득 메운 시민모임 회원들과 학생들의 모습. 당시 재판부는 이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당사자 진술에 앞서 특별히 법정 사진 촬영을 허가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그 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도움을 받아 2012년 10월 일본 소송 원고들과 함께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확정 판결 이후에도 미쓰비시 측이 배상 이행을 거부하자, 김 할머니의 법률 대리인들은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2건을 압류했다.

하지만 정부는 2023년 3월 기업들의 기부금을 거둬 배상금을 대신 지급하는 강제동원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했다.

김 할머니는 양금덕 할머니와 함께 국회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 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에 참여하는 등 반대했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여러 이유로 기존 입장을 바꾸면서 지난해 5월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을 수용함과 동시에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압류도 취하했다.

김 할머니의 유족으로는 2남 2녀가 있으며, 빈소는 안양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 오후 1시다

한편 할머니의 동생 김성주 할머니도 1945년 2월 도야마에 위치한 후지코시 공장으로 강제동원됐다. 김정주 할머니는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올해 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고, 배상 이행을 기다리고 있다.
윤준명 기자 junmyung.yoon@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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