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한 해의 끝자락에 위태롭게 서있다. 2020년은 그 여느 해보다 혼란스러웠고 혹독했다. 학생, 주부, 자영업자, 직장인 등 모두가 낯선 일상에 적응하고자 이토록 분투했던 적이 있었던가. 이처럼 예측불가한 일들이 평온하던 삶의 영역을 침범해왔듯, 인생의 어느 순간에 난관과 역경은 초대받지 않는 손님처럼 불쑥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 시점과 감도, 통과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혹한기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현대 미술사를 개화한 예술가들에게도 힘든 시절은 있었다. 예술을 향한 열정과 끈기로 감내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현대 미술사에 기록되고 기억되고 있다.
후기인상주의자 폴 세잔(Paul Cézanne)은 모더니즘의 기초를 제공하면서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 운다.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라고 피카소가 언급한 것처럼 자연은 원통, 구, 원추로 이루어졌다는 세잔의 조형원리는 입체주의에 영향을 미치는 등 추상미술 신호탄이 되었다. 그러나 쉰 중반이 넘어서야 작가로서 빛을 본 세잔이었다. 그의 생애는 마치 그림자처럼 상처와 우울, 고독이 따라다녔다. 고압적인 은행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22세에 미술가의 길로 들어선 세잔의 출발은 명문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 진학 실패와 로마상 낙선 등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결국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찬 선언은 이루어진다. 과연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쏟아냈던 걸까?
세잔은 한 점의 정물화를 완성하기 위해 100여 회 씩 작업했다. 유독 사과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다른 과일에 비해 잘 썩지 않아서였다. 초상화 모델 또한 150여 회나 자리에 앉혔단다. 그만큼 사물의 본질을 파고드는 집념이 남달랐다. 1891년 고향 엑스에 정착한 세잔은 은둔자처럼 작업에만 열중했다. 세상과 단절하고 오직 그림에만 전념한 것이다. 엑스의 자연에 묻혀 회화의 최종 모티브로 삼은 것은 생트 빅투아르 산이었다. 그의 작품 '생트 빅투아르 산'은 살아있는 자연의 빛과 색채로 표현된 형태의 견고함이 회화적 공간을 창출한다. 미세한 공기의 파장이 생동한다. 리얼리티에 대한 집요한 관찰 끝에 발견한 형태의 본질은 불변의 힘을 과시하는 듯하다.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인식하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명예와 부 또한 공짜로 얻어지지 않았다. 92년 평생 동안 그림, 조각, 도자기 등 5만 여 점의 방대한 작품을 창조한 피카소는 숨을 쉬듯 그리고 또 그렸으며, 콜라주 등 매체의 변화를 추구했다. 어릴 적에는 비둘기 발만 300여 회를 그리면서 데생 실력을 쌓았다. 타고난 재능에 지속된 훈련이 더해지면서 세기의 대가 피카소가 탄생한 것이다.
한 때 피카소도 암울하던 시절이 있었다. 스페인 출신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파리로 간 피카소에게는 눈앞의 성공 보다는 가난과 향수병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여자' 등의 작품에는 젊은 예술가의 슬픔과 고뇌, 생활고 등이 파란색으로 투영되고 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이 시기를 '청색시대'라고 부른다. 불안으로 점철된 청춘을 견뎌낸 피카소는 상당한 명성을 젊은 나이에 쌓게 된다. 몇 년 후인 25세 경 피카소는 새로운 실험에 착수하는데 바로 '아비뇽의 여인들'이다. 화면 안에는 5명 나체 여인들이 공간을 초월한 다각적 시점의 형태로 파편화되고 분해되어 있다. 이를 본 동료들의 혹평에 피카소는 좌절한다. 그 충격으로 거의 10년 동안 이 작품은 감춰져 있었다. 하지만 '아비뇽의 여인들'은 르네상스 미술의 기초인 원근감과 명암법이라는 전통 회화의 개념을 파괴한 입체주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시대 창의력의 상징인 애플사에게 영감을 주는 등 불멸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어떤 일도 끝낼 수 없다는 것과 작업을 잘해냈고 내일은 휴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성 불만족'에 시달렸던 피카소의 인간다운 면모가 잘 드러난다. 완벽을 향한 허기와 갈증은 예술세계를 더욱 담금질한 원천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야수파 선두주자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또한 인생의 굴곡이 있었다.
금기시되던 강렬한 원색이 거칠게 칠해진 '모자를 쓴 여인'이 1905년 '살롱 도톤느'에서 선보여지자 일대 논란이 일었다. 조화와 균형, 비례가 해체된 작품 앞에서 관람객들은 야유하고 분개했다. 모델로 섰던 마티스의 부인까지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티스는 색채로 개인적인 경험과 내면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 아이를 둔 빈곤한 서른 중반 가장의 예술적 소신은 굽혀지지 않는다. 말년에는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아 이젤 앞에 서 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지만 침대나 안락의자에서 할 수 있는 '종이 오리기' 작업을 시도한다. 밝고 생생한 색상의 구아슈가 칠해진 종이를 원하는 형태로 잘라 캔버스에 배치해나갔다. 시련이 되레 작업적 전환점이 된 셈이다. '푸른 누드' 등 일련의 작품에서는 암 수술과 두 차례 폐색전증을 앓았다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역동감과 경쾌함이 진동한다.
지난한 겨울 내내 웅크렸던 씨앗이 봄의 따스한 기운 속에서 얼어붙은 땅을 뚫고 초록 잎들을 배출하듯, 인간 또한 휘몰아치는 한파에도 일어설 채비를 한다. 어찌 보면 현대 미술사는 불완전한 개체들이 불확실한 미래를 끌어안고 몸서리쳤던 삶의 자국이지 않을까? 올해는 모든 게 멈춰버린 '궐위의 시간'이었다면 오는 새해는 어둠을 밀어내는 촛불처럼 생의 진열을 새로이 가다듬어보자. 미동도 없이 제 길을 갔던 대가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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