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민주화 햇불' 박관현… '간양록' 강항 절개의 토양

영광 불갑면 쌍운리
박관현 전남대 총학회장 태 자리
교도소서 5·18 진상 규명 외치며
40여일 동안 단식투쟁하다 옥사
수은 강항 추모 내산서원·용계사
6·25 전후 민간인 희생자도 많아

강항 동상. 내산서원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강항 동상. 내산서원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 성회를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자는 것이오,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라남도 도민 아니, 우리나라 대한민국 모든 민족이 온누리에 횃불을 밝히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족민주화성회 때, 박관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의 연설이다. 말 그대로 열변을 토한 사자후였다. 광주시민의 심금을 울린 그는 이 집회를 이끌면서 '광주의 아들'로 거듭났다.

박관현동상. 그의 태 자리에서 가까운 불갑테마공원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박관현동상. 그의 태 자리에서 가까운 불갑테마공원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박관현(1953∼1982)은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한과 어머니 이금녀 사이에서 5남 3녀의 장남이었다. 그는 불갑초등학교를 다니고,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병장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한 다음, 양심적 법조인의 꿈을 안고 차석으로 전남대학교 법대에 들어갔다. 78년 3월이었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윤상원․장석웅 등과 함께 광천동 일대의 노동자 실태조사에 참여했다. 79년 4월부터선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활동하며 주민과 지역문제를 고민했다.

10월 26일 박정희가 죽고 '서울의 봄'이 왔다. 전국 대학에서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전남대학교도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박관현은 80년 4월 '민주학원의 새벽기관차'라는 구호를 내걸고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5월엔 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를 이끌었다.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인사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박관현은 예비검속을 피해 급히 광주를 빠져나갔다. 그가 없는 광주에서는 열흘 동안 '피의 항쟁'이 펼쳐졌다. 부당한 국가권력과 신군부의 집권 음모에 맞선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었다.

여수를 거쳐 서울의 친척집에 숨어 지내던 박관현은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고통은 죽음보다도 더 버거웠다. 82년 4월 5일 서울의 한 공장에서 정보당국에 붙잡힌 박관현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내란 중요임무 종사라는 죄목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도 그는 의연하게 맞섰다. 광주교도소에서 5․18진상 규명,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40여 일 동안 단식투쟁을 했다. 몸이 쇠약해진 박관현은 82년 10월 12일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났다.

내산서원. 수은 강항을 추모하며 그의 절개와 성품을 기리는 공간이다. 이돈삼
내산서원. 수은 강항을 추모하며 그의 절개와 성품을 기리는 공간이다. 이돈삼

박관현 열사는 지금 광주영령들과 함께 국립5·18민주묘지에 잠들어 있다. 불갑테마공원에는 동상과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고향의 영광군청년회의소에서 세웠다.

영광 쌍운리는 그의 태 자리다. '민주학원의 새벽기관차'는 불갑초등학교를 거쳐 광주동중학교, 광주고등학교, 전남대학교에 멈췄다. 마을에 박관현이 나고 자란 집이 있다. 불갑초등학교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집을 영광군에 기부했습니다. 마당과 텃밭까지 통째 다 내놨어요. 영광군에서 기념사업 용역을 맡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만간 결과가 나오면, 기념사업이 추진될 것입니다." 박관현 열사의 동생 박관택 씨의 말이다.

불갑초등학교에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박관현 등 어린 학생들이 흙을 북돋고 물과 거름도 주며 정성껏 가꾼 나무다. 어린 박관현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줬을 '독서하는 소녀상'도 그대로 있다.

운동장의 구령대에 설치된 놀이터에서는 변화된 시대상이 엿보인다. 오래 전, 교장선생님이 전교생을 줄 세워두고 훈시를 했던 곳이다.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학생들이 주인이라는 느낌을 준다.

내산서원. 수은 강항을 추모하며 그의 절개와 성품을 기리는 공간이다. 이돈삼
내산서원. 수은 강항을 추모하며 그의 절개와 성품을 기리는 공간이다. 이돈삼

마을 뒤쪽 산골에 아담한 저수지가 있다. 지금은 문을 닫은 옛 정미소의 흔적도 도로변에서 만난다. 수확이 끝나면 방아를 찧느라 부산했을 방앗간이다. 명절을 앞두고선 떡방아를 찧으려는 주민들이 줄을 이었을 곳이다.

쌍운리에는 <간양록>의 주인 수은 강항(1567∼1618)을 모신 내산서원도 있다. 일본에 성리학을 전한 강항을 추모하며, 그의 절개와 성품을 기리는 공간이다. 동상과 유물전시관, 사당인 용계사가 있다. 산자락에 강항의 묘도 있다.

강항은 1597년 정유재란 때 호조참판의 종사관으로, 전라도의 군량미를 책임졌다. 일본군에 의해 남원성이 무너지자, 의병을 모아 싸웠다. 중과부적을 실감한 그는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싸우려고 배를 타고 가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로 끌려갔다.

강항은 일본에서 2년 8개월 남짓 포로로 살며, 일본의 정세를 살펴 조선에 몰래 알렸다. 그 기록을 한데 모은 것이 '건거록(巾車錄)'이다. 죄인이 탄 수레, 즉 포로생활을 한 자신의 경험담을 적은 글이다. 나중에 제자들에 의해 '간양록(看羊錄)'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간양록'은 8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됐다. 조용필이 부른 주제가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어버이 한숨짓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내산서원 유물전시관. 강항의 초상과 저술 등이 전시돼 있다. 이돈삼
내산서원 유물전시관. 강항의 초상과 저술 등이 전시돼 있다. 이돈삼

방마산(235m) 자락에 자리한 쌍운리(雙雲里)는 회복(回福), 송정(松亭), 운제(雲堤)마을로 이뤄져 있다. 박관현 생가가 '회복'에 속한다. 복이 돌아온다, 복이 늘 회전하며 머문다는 마을이다. 내산서원은 진주강씨들이 모여 사는 운제마을에 있다. 풍수지리상 불갑초등학교가 발굽, 학교 앞을 지나는 국도가 말고삐에 해당한다고 한다. 학생들이 종소리에 따라 들고나는 소리가 말발굽소리라는 전설도 전해진다.

불갑면은 예부터 물이 풍부했다. 일제강점기에 불갑저수지가 만들어진 이유이다.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의 하나였다. 수리조합 반대 등 사회운동이 일찍부터 펼쳐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방마산 자락 옴팍골에 의문사 사건 희생자 묘도 있다. 한국전쟁 중 빨치산이나 빨치산 협조혐의자라는 이유로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의 유해를 묻었다.

묘 앞에서 한참 머물렀다. 단풍보다도 앞서 가을을 알리는 선홍빛 꽃무릇이 하나씩 보인다. 저만치서 먹구름도 몰려온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이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남도 대변인실

내산서원 유물전시관. 강항의 초상과 저술 등이 전시돼 있다. 이돈삼
내산서원 유물전시관. 강항의 초상과 저술 등이 전시돼 있다. 이돈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