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서구의 침탈" "개신교 최초 전래" 시선 공존

귀츨라프가 정박한 곳, 항(港)은 물골이고 포(浦)는 나루다
항(港)은 항구의 항이 아닌 물목, 물길, 뱃길 등의 개념
좁고 긴 물목은 대부분 ‘항’ 때로는 ‘강’이라고도 했다
지금의 항구 개념 용어는 포(浦) 혹은 포구(浦口)다

고대도 귀츨라프 선교기념비와 기념비문, 이윤선
고대도 귀츨라프 선교기념비와 기념비문, 이윤선

1816년 바질할 대령과 머레이 멕스웰의 영국 국적 군함 프리키트함 알세스트호(Alxeste)와 범선 리라호(Lyra)를 최초 영어성경 전래사건으로 비정한다. 16년 후, 귀츨라프의 애머스트호를 한문성경 전래와 실질적인 최초의 개신교 전도라고 한다. 지난 칼럼에서 이를 다루었는데 한 페친으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제너럴셔면호 사건과 대동강변 순교로 알려진 1866년 토마스 선교사의 한문성경 전래 이야기다. 이때의 성경을 어떤 병사가 벽지로 사용했다가 전도로 이어졌으며 개신교에서는 이를 큰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정보였다. 당시 서구의 침략에 분노한 조선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점과 더불어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오늘 짚어두고 싶은 것은 귀츨라프 일행이 도착했다는 정박지다. 이를 두고 충남 원산도와 고대도 간 다툼이 있었다. 아마도 개신교의 최초 전래라는 상징성을 자기 지역에 두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홍길동이나 심청을 두고 지역간 연고 논쟁이 벌어졌던 것과 같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영국 동인도회사와 한시적 용선 계약을 맺은 애머스트호가 507톤의 상업용 범선이었다는 점이다. 얕은 항구나 섬의 내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귀츨라프의 조선 탐색과 개신교의 전래

귀츨라프의 두 번째 여행은 1832년 2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다. 마카오를 출발해 산동반도에 갔다가 귀환하는 여정 중 우리나라에 도착한다. 처음 도착이 7월 17일이므로 약 3주간에 걸친 체류다. 중국의 여러 섬을 거쳐 조선에 도착한 곳은 조니진 지금의 몽금포 앞바다다. 몽금도(대도) 근처라는 기록이 나온다. 남하하여 외연도 근처에 도착하고 녹도를 거쳐 볼모도(삽시도에 속함)에 도착한다. 7월 17일 조선에 도착한 귀츨라프 일행이 처음 만난 것은 어부들이다. 이들에게 책과 단추, 농어 등을 선물하고 조선의 국왕에게 올릴 통상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한다. 이후 천수만 내륙 창리까지 방문하여 한문성경을 전달한다. 서산의 간월도, 태안의 주사창리 앞 포구 등이 등장한다. 연구자들이 문제 삼았던 애머스트호의 도착지는 어디일까? 고대도 문정관이 저들의 배를 찾아 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애머스트호가 정박했다는 곳을 고대도의 안항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임진(1832)년 7월에 영국배가 홍주(洪州) 불모도(不毛島) 뒷 바다에 표류해오자, 고대도(古代島) 앞항에 끌어다 정박시키고, 충청감사가 장계하였다고도 했다. 고대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귀츨라프의 일기에 도착지를 강갱(Gan-Keang)이라고 한데서 근거를 찾았다. 「순조실록」의 기록 '안항'을 근거로 제시한다. '갱'이 '항'이라는 뜻, 귀츨라프의 표기 방식 중, 오키나와 나하항을 기록하며 나파갱(Na-Pa-Keang)이라고 한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음력 6월 24일 애머스트호를 처음 발견하였으므로, 이때는 원산도 관아에 우후(虞候)가 나와 있던 시기다. 우후가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근무를 한다. 애머스트호가 정박된 위치까지 관선으로 나가 심문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애머스트호에 실려있던 종선을 타고 서산 간월도 앞바다와 태안 주사창리 앞 포구에 나가 성경책을 뿌리며 포교한다. 'Gan-keang'을 기왕의 연구자들은 '강갱' 혹은 '강경'으로 읽었다. 고대도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이를 '안항'으로 읽었다. 실록에 나온 이름이니 '안항'이라는 장소에 대한 이견은 없다. 다만 이를 지금의 항구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가를 문제 삼을 필요가 있다.

원산도 귀츨라프 도착 기념비. 이윤선
원산도 귀츨라프 도착 기념비. 이윤선

항(港)은 물골과 뱃길이고 포(浦)는 나루다

그간의 연구자들이 귀츨라프 일행의 정박지를 원산도나 고대도의 어느 항구로 적시한 부분을 생각해본다. 항(港)은 항구의 항이라기보다는 물목, 물길, 뱃길 등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좁고 긴 물목을 대두분 '항'이라 하고 때로는 '강'이라고도 했다. 남도지역에서 바다를 '갱번'이라고 호명하는 것이 '개옹', '갯골', '물골', '물길'이라는 뜻과 합치된다는 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왕의 연구자들이 적시하였던 지금의 항구 개념 용어는 항(港)이 아니라, 포(浦) 혹은 포구(浦口)다. 대부분 용례가 그렇다. 만약 항구를 표기하고자 했다면 귀츨라프 일기에 등장하는 'Gan-keang'을 포구(浦口) 즉 'port'로 쓰거나 적어도 병기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시대까지 '배가 안전하게 드나들도록 강가나 바닷가에 부두 따위를 설비한 곳'으로서의 항(港)을 항구(港口)로 표기하거나 사용한 예는 거의 없다. 고종 이후에야 무안항(務安港, 지금의 목포항) 등의 용어가 나오기 시작한다. 즉, 부두를 호명하는 용어는 포(浦) 혹은 포구(浦口)이다. '포구를 열다'는 뜻의 개항(開港)도 부두를 열었다는 의미보다는 포구, 즉 들어오는 물길 곧 물목을 열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귀츨라프가 표기한 'Gan-keang'은 물길, 물목, 뱃길과 관련된 위치다. 7월 24일의 일기에 나오는 'safe anchorage(안전한 정박)' 등을 고려할 때, 배의 정박(anchor)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귀츨라프가 port(포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포(浦)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귀츨라프 일기에서도 'Port'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기록에서도 이를 '포구'라는 용어로 호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육지면에 접한 '부두'가 아니라 바다 가운데 혹은 배가 지나가는 물목의 안전한 장소에 속된 말로 '앙카를 박았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그간의 원산도와 고대도 정박지 논쟁은 'Gan-keang'을 지금의 항구 즉 원산도나 고대도의 육지면에 접한 부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 헤프닝일 수 있다. 대부분 항(港)이란 용어는 '노루목' 등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량(梁)과 의미가 유사한 '해협' '물목' 등의 뜻으로 간조시에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아 배가 드나들거나 정박할 수 있는 '목(모가지)'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남도인문학팁

항구, 포구, 부두, 선착장, 정박지, 물골과 나루

지금의 행정구역이나 지명, 나아가 항구의 이름이나 해변의 이름만 가지고는 200여 년 전의 맥락을 온전히 살피기 어렵다. 특히 물길을 말하는 항(港)을 포구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귀츨라프가 표기한 Gan-keang은 '간(강)-항' 또는 '안(앙)-항' 혹은 '관항'으로 읽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미 실록에 '고대도 안항'이란 위치가 명시되어 있다. 이를 물골의 의미로 읽는 눈이 필요하다. 안항(Gan-keang)은 고대도 뒷바다, 또 고대도 앞 항구(물목이란 뜻)와 동일한 위치다. 고대도 뒷바다는 고대도와 장고도 사이를 말할 것이다. 고대도 앞 항구는 원산도와 삽시도 사이를 말할 것이다. 이곳은 서해를 오가는 배들이 지나가는 물길이기도 하며 관아가 있던 원산도 관촌으로 들어오는 물목이기도 하며 귀츨라프의 애머스트호가 정박(anchor)했던 위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애머스트호가 정박한 장소 혹은 위치는 원산도 포구도 아니고 고대도 포구도 아닐 수 있다. 역으로 고대도일 수도 있고 원산도일 수도 있다. 정박은 고대도 안항(물골)에 하고, 조사는 원산도에서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선을 타고 서산 간월도 앞바다와 태안 주사창리 앞 포구까지 나가 성경책을 뿌리며 포교했다고 했다. 감자의 전래가 이곳일 수도 있다. 서구에 의한 침탈로 보는 시선과 개신교 최초 전래라는 시선이 공존한다. 지역간 '최초'논쟁도 공존의 지혜 속에서 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