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굴곡진 한국 근·현대사 산증인 완도 이기홍

완도 고금 출신, 부친통해 민족의식 눈떠
광주고보 입학 독서회·학생독립운동 앞장
시험 거부 동맹휴업 주도, 퇴학당해 귀향
‘전남운동협의회’ 결성 활동중 체포 수감
해방·6.25·4.19·5.16 등 파란만장한 일생
불의에 맞서 정의로움 실천에 온몸 던져

고금도항일운동충혼탑, 왼쪽 석비에 이기홍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고금도항일운동충혼탑, 왼쪽 석비에 이기홍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국 근·현대사 산증인, 학생독립운동 주역 이기홍
한국 근·현대사 산증인, 학생독립운동 주역 이기홍
이기홍의 부친, 이사열
이기홍의 부친, 이사열

백지동맹의 주역, 퇴학을 당하다

이기홍(李基洪, 1912~1996)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에서 이사열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부친 이사열은 한성외국어학교 일어과를 다닌 엘리트였지만, 1910년 8월 국권을 빼앗기는 비참함과 일진회 등 친일파의 망동(妄動)을 보고, 보장된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낙향, 고금도 청용리에 정착한다.

이사열은 고금도에 찾아온 아이들에게 경성에서 경험했던 망국 전후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등을 통해 습득한 국제정세를 나누었다. 외진 섬마을에서 접할 수 없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으며 아이들은 민족의식에 눈을 떴고, 의식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의 아들 이기홍도 그중 하나였다.

고금보통학교(현 고금초등학교)를 졸업한 이기홍은 1928년 4월 광주고보에 입학하였고, 2학년 때인 1929년 성진회를 이은 독서회의 주요 멤버가 된다. 독서회는 사회주의 입문 서적을 토론하며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고, 이론 무장을 넘어 항일 독립운동의 조직적 추진을 위한 단위가 되었다. 광주고보에 이어 광주농업학교와 전남사범학교에도 독서회가 결성되었고, 광주여고보에는 소녀회가 결성된다. 맹휴투쟁과 독서회 결성 등으로 조직과 투쟁역량이 높아진 가운데,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1929년 11월 3일은 일요일이었지만, 학생들은 등교해야 했다. 메이지 왕의 생일날로 일본의 큰 명절인 명치절(明治節)이었기 때문이었다. 3일 오전의 광주역에서의 충돌은 일본 중학생이 광주천변에서 광주고보생 최쌍현을 칼로 찔렀던 것이 계기가 되어 누적된 분노가 일시에 폭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12일의 2차 시위는 광주 사회·청년단체의 간부인 장석천과 장재성·강석봉 등이 강력하고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할 것과 전국적인 시위로의 확산을 모색한 결과물이었다. 학생투쟁지도본부가 결성되었는데, 광주 및 전조선 학생의 지도는 장석천이, 광주 조선인 학생의 지도는 장재성이, 전남 도내 지방 학생의 지도는 국채진이 나누어 맡았다. 광주 및 전조선 학생의 지도를 맡은 장석천의 고향 역시 이기홍이 태어난 완도였다.

11월 12일 오전 9시, 수업 시작종을 신호로 광주고보생들은 일제히 교문을 뛰쳐나왔다. 전단 및 격문 배포는 독서회 회원들이 맡았다. 광주고보 독서회 회원이던 이기홍은 「학생 민중이여 궐기하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등이 쓰인 전단을 나누어주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기홍은 곧바로 풀려나왔는데, 저학년인 2학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광주의 모든 학교에는 또다시 휴교령이 내려진다. 이기홍은 고향 고금도로 내려와 2학년 겨울을 보낸 후 1930년 1월 초 광주로 올라왔다. 1월 7일은 개학식이었고, 1월 8일에는 전년도의 휴교 조치로 미실시된 2학기 시험일이었다. 아직 수백 명의 학생들이 광주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험을 치른다는 사실에 심한 자책감을 가지고 있던 이기홍은 1월 8일 아침 독서회 선배로부터 시험 거부 쪽지를 전해 받는다. 당시 이기홍은 을반 반장이었다. 이기홍이 앞장서 시험 거부 요지를 설명하자 다수 학생이 이에 찬동했다. 선생님이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교탁 앞에 섰을 때 이기홍이 벌떡 일어나 시험 거부를 외쳤다. 57명의 급우 중 일부를 제외한 학우들이 '와' 하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왔다. 백지동맹을 결행한 3일 후 이기홍은 하숙집에서 퇴학통지서를 받는다.

고금도 농민운동의 중심이 되다

고금도에 내려온 이기홍에게는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운동에 가담했던 고금도 출신 학생들이 퇴학당하면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전남사범학교 최창규, 경성제1고보 황인철, 경성고학당 박노호, 보성고보 김진호 등인데, 이들은 후일 농민운동의 동지가 된다.

더 중요한 만남도 있었다. 1920년 1월 고금도 3·1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그의 당숙 이현열과의 만남이었다. 이기홍이 8살이던 당시 일본을 규탄한 이현열의 짧은 연설은 이기홍의 가슴을 두려움과 흥분으로 고동치게 했다. 그런 이현열을 10년이 지나 다시 고금도에서 만난 것이다. 그는 출소 후 일본에 들어가 사회주의자가 되어 맹렬히 활동하다 강제 귀국을 당하여 고금도에 돌아온 것이었다.

이기홍이 이현열과 힘을 모아 전개한 첫 번째 농민운동은 고금도의 용지포를 둘러싼 일본 지주와의 투쟁이었다. 이현열은 청년과 농민조직을 동원하여 '용지포 이권옹호 동맹'을 결성하여 투쟁에 나섰고, 결과는 일본인 지주가 고금도 농민에게 땅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당시 소작쟁이가 빈발하던 시기에 농민조직의 힘으로 승리를 쟁취한 놀라운 사례였다. 이후 이한열은 날조된 죄목으로 수감되었고, 1933년 6월 세상을 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받은 이가 이기홍이었다.

이기홍은 인근의 젊은 사회운동가들과 유대를 맺었는데, 완도군과 해남군·강진군 등에서 사회 농민운동을 하던 김홍배, 황동윤, 윤가현, 오문현이 그들이었다.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운동의 의지를 공유하던 20대의 젊은 청년들은 지역 농민운동을 발판으로 강력한 항일운동 세력을 만들고, 나아가 농민운동을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이끄는 '중앙지도부'를 구성하였다. 1933년 5월 해남 북평면의 암자인 성도암에서 조직된 '전남운동협의회'가 그것이다. 협의회의 총 책임 및 사무는 김홍배, 조직 및 재정은 오문현, 조사 및 출판은 황동윤 그리고 구원 및 선전 교양은 이기홍이 맡았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짧은 기간에 해남・강진・완도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그해 연말 송년회 자리에서 벌어진 해프닝이 빌미가 되어 조직이 노출되면서 체포되고 만다. 대공황 이후 일본 내에서 급성장한 공산주의 세력에 고민하던 일제는 이 사건에 '빨갱이'라는 덫을 씌운다. 1934년 2월 체포된 이기홍은 각종 고문을 당하였으며 2년여 수감 끝에 첫 공판이 열려 2년 6월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4년여의 감옥생활 후 1938년 늦은 봄에 출소한다. 이후 그는 보호관찰 대상자가 되어 거주 제한을 당하다 해방을 맞는다.

통일 정부를 꿈꾸다

해방이 되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결성되었고, 광주에서도 지부가 설립되었다. 이기홍은 광주 건준의 노동부 책임자로 선임되어 종연방직을 비롯한 일본인 사업체의 접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미군의 진주로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건준이 만든 인민위원회는 해산된다. 1946년 조선공산당(후일 남로당) 광주시당에 참여한 그는 농민조합총연맹 전남연맹의 부위원장 겸 조직부장을 맡아, 미군정의 하곡수집령 반대 투쟁에 참여하였다. 일제에게 눈엣가시였던 그는 해방 공간에서 다시 미군정의 가시가 되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을 결성하여 사회주의 인사를 강제로 가입시켜 관리하였다. 6·25가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적에 동조할 세력으로 간주하고 체포 후 무차별 처형하였다. 이기홍도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처형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뒷 순번이었던 이기홍은 극적으로 처형을 면했다. 인민군이 광주 가까이 내려오자 더 이상 처형하고 뒤처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기홍의 아픔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54년 옛 동지의 부탁으로 북한과 연계된 노장환이라는 인물을 만났다가 불의의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19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된 소위 '구국투쟁동맹전남지회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기홍은 1심에서 10년, 최종 3년 6월을 선고받는다. 그가 만기 출소한 것은 1958년이었다. 그리고 맞이한 것이 4·19혁명이었다.

4·19를 거치면서 혁신세력이 정치권에 등장할 환경이 마련되자, 진보 세력들은 윤길중을 대표로 하는 사회대중당을 창단하였다. 전남에 도당이 결성되자 이기홍은 조직 확대에 매진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참패였다. 이후 사회당이 창당되자, 전남도당에서 당직을 맡지 않고 실질적인 조직 건설 작업을 담당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혁신계 정당들은 또 대대적인 탄압을 받는다. 이기홍은 체포를 피해 3년을 버텼지만, 1964년 검거된 후 광주고등군법회의에서 또 6년을 선고받는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1년 2개월 만에 소급법이 폐기되면서 면소(免訴) 판정을 받고 석방되었지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1980년 전두환 군부의 만행을 목격하면서 피눈물을 흘렸던 그는 1996년 12월 7일 85세의 일기로 고난했던 삶을 마감하고 영면에 든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2016년 그의 기억과 기록을 중심으로 『내가 사랑한 민족, 나를 외면한 나라』가 간행되었고, 2019년에는 '민족·민주·통일운동가 이기홍 평전'이 편찬되었다.

한국의 근·현대는 격변의 시대였다. 그 격변의 시대에 일제와 맞서고 분단과 맞서고 독재와 맞서 한치도 흐트럼없이 싸운 분이 이기홍이다. 그가 선고받은 총 형량은 18년이 넘었고, 그가 감옥에 있었던 시간은 12년 6개월이나 된다.

이기홍의 삶은 곧 한국의 굴곡진 근·현대사 그 자체다. 그의 삶은 눈물겹도록 정의롭다. 그는 늘 불의에 맞서 시대정신인 정의로움을 실천하는데 온 몸을 던졌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어쩐지 허전하다. 오늘 독립유공자 서훈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기록한 평전이 있고,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자가 있는 한 '이기홍'은 역사의 승리자로 남을 것이다.

2016년, 고향 청용마을 가까이에 건립된 '고금 항일운동 충혼탑'에 '이기홍'이라는 이름만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