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왕건이 후삼국 통일 전 꿈에 건넌 여울 '夢灘'

무안 상몽탄마을
영산강 옆 끼고 질 좋은 흙 많아
조선 후기부터 40여년 전까지
옹기·백자·분청사기 등 만들어
마을 앞 공동 우물 '장수정'
물 맛 좋아 장수마을로 명성

공동우물 '장수정'의 표지석. 상몽탄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공동우물 '장수정'의 표지석. 상몽탄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어약연비(魚躍鳶飛). 물고기가 물에서 날뛰고 솔개가 하늘을 난다는, 만물이 제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평범한 일상, 즉 태평성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산강변이 그랬다. 물고기가 강물에서 솟아오르고, 하늘엔 새들이 날고 있었다. 아주 평온한 강변 풍경이다. 물 위로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숭어가 강변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 물결의 파장이 잔잔한 강물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강변 둔치를 연녹색으로 덮은 사광이풀, 사광이아재비도 눈길을 끈다. 고양이나 살쾡이가 속이 불편할 때 뜯어먹는다는 풀이다. '며느리배꼽' '며느리밑씻개'로도 불린다. 겉보기에 솜털 같지만 따끔한 가시가 있어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골탕 먹일 때 썼다는 이야기가 서려 있다. 부인성 질환과 피부병, 소화불량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전한다.

강변에 부잔교도 설치돼 있다. 영산강의 전통 뱃길을 되살려 옛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는데 필요한 시설물이다. 당초 목적은 간데없고, 쓰레기만 나뒹굴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강변도로 한쪽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손가락으로 옹기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강변마을에서 많이 굽던 옹기를 상징하고 있다. 그 옆에 잠시 쉬면서 강변을 바라볼 수 있는 정자도 있다.

영산강변, 무안 석정포다. 옛날 강변 마을에서 생산된 옹기를 돛배에 실어 나르던 포구였다. 석정포를 출발한 돛배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옹기를 팔았다. 옹기의 원료가 되는 점토와 고령토는 강 건너 나주 동강 일대에서 채취해 왔다. 석정포는 옹기의 원료 수송에도 중요한 포구였다.

공동우물 '장수정'의 표지석. 상몽탄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공동우물 '장수정'의 표지석. 상몽탄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석정포를 품은 마을이 '상몽탄'이다.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몽강1리에 속한다. 상몽탄은 조선 후기부터 1970년대까지 옹기와 질그릇을 생산한 도요지였다. 옹기와 질그릇뿐 아니라 백자와 분청사기를 만들었다. 분청사기는 표면에 백토를 바른, 회청색의 그릇이다.

옹기가 번성을 누리던 60년대엔 전체 마을주민 90여 가구가 옹기를 만들었다. 마을에 가마 4기와 공방 7곳이 운영됐다. 목포 삼학양조장에 '소주독'을 납품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상몽탄이 옹기마을이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해상 교통로인 영산강을 옆에 둔 것이 가장 컸다. 판로나 재료 운반에 드는 비용이 어느 지역보다 싸고 편리했다.

석정포에 세워진 옹기 조형물. 상몽탄마을 앞, 영산강변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석정포에 세워진 옹기 조형물. 상몽탄마을 앞, 영산강변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옹기의 재료인 흙, 그 중에서도 질 좋은 점토가 많이 매장돼 있었다. 이는 주암호와 목포를 잇는 상수관을 묻으면서 확인된 사실이다. 지리적으로 강진과 가까운 덕에 인력 확보도 쉬웠다. 강진청자가 쇠퇴하면서, 청자를 굽던 도공들이 옮겨와 옹기를 만들었다.

석정포는 목포와 영산포 구간의 영산강을 오르내리던 돛배의 중간 쉼터이기도 했다. 주변에 포구촌이 형성됐고, 번창했다.

석정포는 '돌코쟁이 포구'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돌코쟁이는 '돌곶이'를 가리킨다. 포구의 지형이 강 가운데로 약간 튀어나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옹기는 1970년대 들어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그릇이 등장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질그릇 문화도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은 김옥수 분청자기 명장이 명맥을 잇고 있다. 김 명장의 4대조 할아버지가 쓰던 120년 된 가마와 근래 만들어진 개량가마가 마을에 남아있다.

상몽탄은 영산강변 도로와 맞닿아 있다. 장어로 유명한 명산마을을 '하몽탄', 강 건너 나주 동강 몽송마을을 '건넷몽탄'이라 불렀다. 영산강에 큰 배가 드나들 땐 석정포, 윗구지, 아랫구지 3개의 포구가 있었다.

마을은 임진왜란 전에 나주사람 나두광이 옮겨 와 살면서 이뤄졌다고 전한다. 마을 앞에 공동우물 '장수정'이 있었다. 물맛이 좋기로 무안과 목포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마을주민들도 무병장수를 하면서 '장수마을'로도 명성을 날렸다.

영산강변 석정포의 정자. 옹기 조형물과 나란히 있다. 이돈삼
영산강변 석정포의 정자. 옹기 조형물과 나란히 있다. 이돈삼

상몽탄은 왕건과도 엮인다.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이 후백제를 치려고 영산강을 따라 나주 동강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견훤 군사의 공격을 넘어설 수 없었다. 왕건은 나주 몽송까지 밀렸고, 견훤 군사들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그날 밤, 백발의 노인이 왕건의 꿈에 나타나 호통을 쳤다.

"대업을 이루겠다는 장수가 주변 상황도 모르고 잠만 자느냐? 지금 영산강물이 빠지고 있으니, 군사를 이끌고 빨리 강을 건너라. 파군천 하류에 진을 치고 있다가 뒤쫓아오는 견훤군을 쳐라."

왕건은 백발 노인이 알려준 대로, 군사를 재촉해 영산강을 건넜다. 파군천을 사이에 두고 숨어 있다가 뒤쫓아온 견훤군을 협공했다. 후백제 공략의 교두보와 함께 후삼국 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 일대의 지명이 몽탄(夢灘), 강을 몽탄강(夢灘江)이라 부른 이유다. 꿈에 건넌 여울이다.

상몽탄 사람들은 옹기를 굽던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옛것을 계승하고 보존하며 후대에 물려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마을에 옹기미술관, 옹기 연구소가 들어서고 옹기 특화단지로 조성되길 바라고 있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